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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설교

[조직신학 설교45 구원론] 성도의 견인(堅忍)(예레미야 15:15)

by 조직신학 교리설교 2023. 3. 7.

품절. 중고서적에서

 

품절. 중고서적에서
품절. 중고서적에서

성도의 견인(堅忍)

예레미야 15 15

서론

오늘은 구원론 끝자락 부분 성도의 견인에 대한 말씀입니다. 주후 354430년 경, 북 아프리카에 살았던 어거스틴은 독실한 크리스천 어머니에게서 출생했으나 청년시절에 온갖 방탕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다 결국 주님께로 돌아와서 참회록을 썼는데 내용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기 전까지는 인생에 안식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후에 대신학자가 되고 자신의 삶을 반추(反芻)하면서 성도의 견인교리를 말합니다. ‘성도의 견인, 하나님께서 한번 선택한 자는 어떤 경우에도 절대 버리지 아니하고 계속적으로 회개케 하여 구원을 얻게 하신다, 는 것입니다.

성도의 견인은 하나님의 인내

구원의 주체는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자신에게 무슨 구원의 능력이 있겠어요? 운동한답시고 비싼 운동기구 들여 놓고 한 달도 채우지 못하는 우리에게 자신을 구원해 낼 능력이 있습니까? 새벽기도 한다고 비싼 자명종부터 사놓고 굳게 결심하지만 2,3일 못 가서 손으로 종소리를 꺼버리는 우리에게 한 번 받은 구원을 평생토록 지켜낼 힘이 있겠습니까?

구원은 시작부터 천국 입성까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는 성화에서 진도가 더디 나타나도 한번 받은 구원이 취소되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받은 구원을 끝까지 보존해 주신다 하여 성도의 견인’(堅忍)이라 합니다.

[‘성도의 견인교리가 신학자들의 일치된 견해는 아닙니다. 신학자 간에, 교파 간의 주장이 다릅니다. 장로교는 성도의 견인 교리를 주장하지만, 감리교등에서는 수용하지 않습니다. 사실 이것이 구원과 직접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런 지엽문제를 가지고 다른 교파를 비판하는 일은 옳지 않습니다. 장로교와 감리교 교리가 종종 대립되는 것 같지만 넓게 보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장로교는 하나님 편에서 내려다보고, 감리교등은 사람 쪽에서 올려다보기에 그림이 다르게 보일 뿐 실상은 모두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담고 있습니다. ‘성도의 견인교리도 한쪽만이 옳다고 우길 수는 없습니다.

-이 부분은 넘어가도 됨]

 

성경에는 성도의 견인 교리에 맞지 않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3:12)라고 했습니다. 구원의 취소를 염려하라는 말로 들립니다.

 

이 구절을 오해하면, 구원이 내 행동 여하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잘못을 저지르고 잠시라도 악한 마음을 품으면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고, 구원의 길에서 탈락해 버리는 줄로 압니다. ‘성도의 견인이라는 한문의 뜻도, 굳을 견()에 참을 인()으로서, 신자 각자가 내 힘으로 굳게 믿고, 참으면서 구원을 내가 지켜내야 한다는 말처럼 들리기 쉽습니다.

 

성도의 견인은 정확하게 표현하면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견인입니다. 믿음생활에서 성도 자신들의 인내도 물론 필요하지만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있어 어떠한 죄와 악행에서도 우리 구원이 유효하고 보존된다는 것이 이 교리입니다.

 

15, “주의 오래 참으심으로 말미암아 나로 멸망하지 아니하게 하옵시며

 

부모가 참지 않으면 자식들의 오늘이 있을 수 없습니다. 철딱서니가 없고 사람 노릇 못할 때도 부모니까 참아줍니다. 그래서 어른이 되는 것이고 사람 노릇을 하게 됩니다.
30대의 남자가 슈퍼마켓에서 어린 아들과 장을 보는데 아들이 어떻게나 장난이 심했던지 물건들을 내동댕이치고 난리였습니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침착하게 타이르듯 말했습니다.

지미야! 참아라!” “지미야! 참아라!”

계산대에 앉았던 아가씨가, “아들에 대해 그렇게 친절히 지도하며, 지미로 하여금 참도록 타이르는 데에 감명을 받았다말했습니다. 그 남자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지미는 아이의 이름이 아니라 내 이름이란 말입니다.”

누가 참는다고요? 아들이 참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인내! 아버지가 참아내고 있습니다.

 

하나님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평생 잘 믿을 수 있나요? 실수도 하고 성도답게 살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를 양자 삼아주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내 손목 잡아주시며, 내가 연약하여 죄를 저질렀어도 참으시며, 돌아오기를 기다려 주시기에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성도의 견인에는 이처럼 구원에 대한 확신이 들어있습니다.

끝까지 구원하시는 이유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성에도 참아주시며 구원의 믿음을 지켜주시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1) 하나님의 속성에 근거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창세전에 완벽히 계획해 놓으셨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11:29).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우리의 부패성을 아십니다. 내게 쓸 만한 것이 있어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아직죄인되었을 때 부르셨습니다(5:8). 그런 분이 우리를 구원해 놓으시고 쓸 만한 게 없다고, 볼 만한 게 없다고 구원을 취소하거나 부르심에 후회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일관성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조건 없이 구원을 작정하시고 구원을 이루셨기에 당신의 약속에 책임을 지시고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그러기에 내 죄가 남들에게 인정받는 삶을 사는 데는 영향을 끼치고 성화를 더디게 하지만 구원 문제만큼은 하등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한 번 구원하시면 영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인내하심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야곱에게서 하나님의 인내를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은 고향을 떠나면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언약을 먼저 맺어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곧 너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어떠한 경우에도 야곱과 맺은 언약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야곱도 하나님과 약속했습니다. 하나님만을 섬기겠다! 이곳에 전을 세우겠다! 십일조생활을 하겠다! 야곱은 20년 동안 약속을 지키지 않고 객지에서 불신앙적인 삶을 계속했습니다. 야곱은 참으로 불쾌한 인간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십니다! 야곱과 맺은 약속, 야곱의 조상들과 맺은 약속도 약속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신실하신 속성에 근거해서 그 약속을 유지합니다. 야곱이 돌아설 때까지 기다리시며 인내하십니다. 지렁이 같은 야곱이 왕자로 변신할 때까지 오래 참아주시며 기다리십니다. 모두가 포기한 야곱을 버리지 않으시며 야곱이 돌아설 때까지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결국 하나님의 인내라는 속성이 인간 성화의 최고봉 야곱을 만들어 내신 것입니다.

 

영어 찬송가 중에 이런 내용이 있다고 합니다.

 

영원히 잠들려고 예수의 품에 안긴 영혼은

내가 결코 원수의 손에 아니 버리겠노라.

저 영혼을 온 지옥이 달라붙어서 뒤흔들 지라도

나는 결코, 결코 버리지 않을 것이다.

 

2) 우리가 거듭 날 때 이미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영생하는 생명입니다. 이 생명 하나만 소유하면 성별과 나이, 죄의 경중과 관계없이 하늘나라에서 영생할 수 있습니다. 이걸 보고 사탄이 못 견뎌합니다. 원래 우리는 사탄의 수하였고 종이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거듭남으로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게 되니 사탄이 가만있을 수 없습니다. 죄짓게 하고 사탄의 기질로 살아가게 합니다. 온갖 말로 하나님께 고소하며 내 양심을 자꾸 충동질하면서 구원의 길에서 벗어나도록 합니다.

 

그러나 거듭날 때 들어온 하나님의 생명은 다시 꺼낼 수 없습니다. 왜냐? 완전히 코팅(?)되었기 때문입니다. 코팅 된 것을 걸레로 닦는다고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품안에 일단 들어오면 하나님은 절대로 당신의 것을 사단에게 빼앗기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영생을 그 손에서 빼앗아갈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만유(萬有)보다 크신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한 번 구원 받으면 하나님의 완벽한 보호를 받을 수 있고 완전한 보장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움켜 쥔 손바닥 속에 있는 보화입니다. 누구도 이 보화를 빼앗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온 세상보다 강하시기에 그의 보화(성도)를 빼앗을 자는 마귀 중에도 없습니다.

 

칼빈주의 신학자 로레인 뵈트너의 말처럼, 하나님의 수중에서 한 사람의 성도를 빼앗는 일은 하늘에서 별 하나를 따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입니다. 성도의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능력에 의해서 멸망의 위험이 도무지 미치지 못하는 곳에 인()쳐 놓았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칭의(稱義)를 선포하셨습니다.

칭의 선포는 하나님과 나 사이에서 맺어진 것이 아니라 성부와 성자 사이에서 맺어진 언약에 근거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는 자들에게는 죄사함의 은총을 허락하겠다는 그 보장을 받고 성자는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그 계약에 근거해서 의인이 되는 것이지 우리의 행위에 근거하여 의인으로 선포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우리의 행위에 근거했다면 죽을 때까지 큰 죄인에서 약간의 죄인으로다시 큰 죄인에서 작은 죄인으로왔다 갔다 하면서 평생을 구원에 대해 조마조마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영접하는 자에게 단 한 번의 칭의로 영원한 의인으로 인정해 주십니다. 그의 구원문제를 책임지십니다. 성령의 역사를 통해 믿음을 굳세게 하며 우리를 대하여 참으셔서 끝까지 구원을 인정하시고 구원을 완성시키십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구원은 안전합니다.

 

바울이 자기의 죄성에도 불구하고 누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으랴, 환난이냐칼이냐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8:35~39 참조)고 외친 것은 양자로 삼아주시고 칭의를 선포하시고 하나님의 인내가 있기에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교리를 거절하는 신학자들도 있습니다. 성도의 중생 전까지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 보나 중생 후부터는 인간의 공로로 봅니다. 내가 주님을 떠나가면 아무리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시려고 해도 구원이 취소되거나 이루어질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로마 가톨릭은 중생 전, 후를 인간 공로로 보기에 트랜트회의에서 법령으로 선포하였습니다.

누구나 한번 칭의를 받은 사람은 은혜를 놓쳐버릴 수 없다 주장하면저주를 받을 것이다.”

로마 가톨릭교회가 성경에 무지해서가 아니라 자기들의 권위와 교리에 맞추기 위해 성경과는 반대의 주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인간 구원을전능하시고, 불변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둡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우리를 구원의 백성으로 선택하시고, 우리의 행위 여하에 관계없이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 이름은 하늘나라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10:20). 내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도 독생자를 보내면서까지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이 이제 새삼스럽게 내 행위 여하에 따라 구원을 취소하고, 생명책에서 이름을 삭제해 버리실까? 하나님의 속성으로 보아 NO! 입니다.

 

우리 구원이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는 것은 두려워할 일도, 부담스러운 일도 아닙니다. 오히려 안심이 되고, 든든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손안에 내 구원이 들어 있는 한 안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내 구원을 전지전능하시고, 불변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두지 않고, 죄 있는 인간의 행위에 둔다는 것은 얼마나 불안스러운 일입니까! 범죄의 성향을 충분히 가진 자들이 구원의 보증을 자기의 능력 위에 둔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성도의 견인이 게으름에 이용당할 우려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쉽게 죄를 짓고 마음대로 살아도 되겠네?”라고 할 사람도 있겠고 심지어는, 이미 구원을 받은 사람은 교회에 안 나가도 괜찮겠네? 구원이 최소되지 않으니까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면 성도의 견인교리를 오히려 흔들릴 수 없는 구원으로 봉해버리고 대신에 성화를 위해 더욱 노력합니다. 자동차보험은 안전을 뜻합니다. 보험에 들었기에 일부러 자동차 사고를 내는 사람은 정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보험료가 적게 나오도록 더 조심하고, 그러면서 편안한 마음으로 운전대를 잡고 달려갑니다.

우리의 구원이 그렇습니다! 한번 받은 구원은 취소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죄에 대해 방조하고 죄를 짓도록 성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조심하게 되고 그러면서 구원을 안심하게 하여 평안한 믿음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돕게 하는 위대한 교리 중의 하나입니다.

 

인터넷 속의 글들은 아무리 해도 관리자 외에는 지워질 수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누구도 취소할 수 없고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성도의 견인, 남용할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기에 오히려 안전하게 신앙생활을 하며 성화의 단계로 열심히 나아가야 합니다.

결론

어느 교수가 강의 도중에 10만 원짜리 수표를 꺼내들며 이거 가질 사람 손들어보세요.” 했습니다. 당연히 모두 손을 들었습니다. 교수는 10만원 수표를 주먹에 꽉 쥐어 구기더니 다시 이거 가질 사람 손들어보세요.” 물었습니다. 이번에도 모두 손을 들었습니다. 교수는 그걸 바닥에 내팽개쳐, 발로 밟았고 수표는 구겨지고 신발자국이 묻어서 더러워졌습니다. 교수가 또 이거 가질 사람?” 물었습니다. 역시 모두 손을 들자 교수가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구겨지고 더러워진 10만 원 짜리 수표일지라도 그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 같군요.”

우리 아들 형제가 동전이 목구멍으로 들어갈까 말까서로 내기하다가 한 아이가 그걸 삼켰어요. 개인의 프라이버시가 있으니까 누구라고 말할 수는 없어요. 동전이 배설할 때 나오지 않으면 수술해야 한답니다. 그날부터 우리 부부는 신문지 깔아놓고 헤쳐 보는 것이 일과가 되었습니다. 3,4일 후에 드디어 동전이 나왔습니다. 우리는 할렐루야~를 외쳤습니다.

 

그런데 당사자 아들은 그걸 들고 슈퍼로 가서 먹을 걸 사다 맛있게 먹습니다. 슈퍼주인은 그 동전의 가치를 그대로 인정해 주었습니다. 똥냄새가 난다고 안 받겠다 하지 않고 절반밖에 못 쳐준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비록 똥 묻었던 동전이지만 그 가치는 그대로였습니다.


그래요!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의 가치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성으로 구겨지고 더러워진 일지라도, 나는 누구인가? 하나님의 선택을 입은 사람이며 중생한 사람이며 구원을 받은 사람입니다. 내가 실패하고, 주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해도 구원받은 나의 가치는 변한 것이 아닙니다. 죄로 구겨지고 더러워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기본적 가치는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은 영원한 보장성 보험입니다. 하나님의 성도의 견인’, 인내가 만들어 내는 구원의 보장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은혜를 주신 하나님의 인내를 더욱 찬양하며 살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