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아들이 됨)
로마서 8장 12-17절
서론
영국의 동물학자이자 무신론 운동가인 리처드 도킨스는 <눈먼 시계공>을 썼습니다. 진화론자인 그는 이 책에서 “세계는 설계되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인간의 생애, 구원이 처음부터 설계되었다고 합니다. 우리 DNA가 이미 조상들의 가계(家系)에 입력되어있는 것처럼 구원도 이미 예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설계 속에 입력되어 있던 우리는 구원의 무대인 세상에서 어느 날 불러주시고 거듭나게 하시고 믿게 하시고 회개하게 하십니다. 그 순간 의인(義人)의 신분을 얻게 되고 하나님의 양자(養子)가 됩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이 무엇인가? 소극적으로는 칭의-의로운 신분을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벌의 죄에서 자유함을 누리는 것입니다. 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즐거운 친교를 누리며 이 땅에서 살다 저 세상에서 영생하며 사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양자됨에 대해서 함께 나누겠습니다.
양자 삼기 위해 삼위가 하신 일
이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사단의 종된 신분에서 벗어나 자유의 몸이 되었고(요 8:36),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천국 시민의 일원으로 우리를 받아 주신 것만이 아니라 당신의 양자로 우리를 그 호적에 입적시켜 주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34번은 이 사실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양자로 삼는 것은 하나님의 값없으신 은혜로 정하신 것인데 이로써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의 수효 중에 들게 하시고, 그 모든 특권을 누리게 하시는 것이다.”
위의 내용을 세 가지로 요약해 보면,
㉠ 양자가 됨은 하나님의 값없으신 은혜이다(내 공로가 아니다).
㉡ 수많은 사람 중에서 얼마를-바로 나를 하나님의 자녀의 수에 들게 하셨다.
㉢ 모든 특권을 누리게 하신다(그 특권은, 이 땅에서 보는 축복의 특권,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생 등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가 될 때에 이처럼 엄청난 특권이 수반됩니다. 이런 특권을 주시기 위해 삼위일체 하나님은 각각 사역하셨습니다.
•성부 하나님-성부는 창세전부터 당신의 생명책에 우리를 양자의 호적에 올려놓으셨다.
•성자 하나님-죄의 종이었던 우리를 속량하시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내주셨다. 그분은 죽으시면서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자녀로 삼아 주시도록 하나님께 간곡히 호소하셨다.
•성령이 하신 일-우리 마음속에 있었던 무서워하는 ‘죄의 영’, ‘종의 영’을 쫓아버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고, 믿게 하신다.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도무지 하나님의 자녀임을 믿지 못한다.
이처럼 삼위일체 하나님이 협력하여 역사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으며, 돼지가 더러운 오물통에서 뒹굴며 먹고 눕고 살이 쪄 도살장으로 끌려가듯 우리도 지옥의 형벌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런 자리에서 건지시고 양자로 삼아 주셨습니다. 에프 쉰이라는 사람은, “우리가 가치 있는 인간이기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가 가치 있는 인간이 되었다.”라고 말하여, 모든 은혜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온 것임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양자
하나님의 책에 기록(예정)된 자들이 양자가 되는 것이지만 그 과정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그 순간부터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을 마음속에 영접함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우리 속에 계신 아들 예수를 보고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로 인정하십니다. 즉, 독생자를 영접했기에 우리는 저절로 양자가 된 것입니다. 물론 독생자와 양자가 신분상 동일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독생자에게 주셨던 모든 특권을 우리들에게도 주십니다.
유명한 신학자 하르낙은, 예수 믿는 사람들의 신분에 대해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사람이다.
* 자신을 하나님의 자녀로 생각하며 사는 사람이다.
* 이웃은 다 같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형제자매라는 마음으로 사는 사람이다.
이것이 기독교의 윤리관이자 구원관입니다. 요즘 ‘정체성’이란 말을 많이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하는 나의 정체성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찾아야지 다른 곳에서 찾으면 답이 없습니다. 답이라 생각하며 살았는데 어느 날 그게 아니구나! 회의에 빠지게 되면 머리 깎고 세상 등지고 갑자기 방향 선회를 해서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합니다.
어느 진화론자가 평생을 진화론만 주장하다 나이 들어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지나간 생애를 후회하면서 “진화론을 가르치면서도 한 가지 꺼림칙한 것은 동물원에 가서 원숭이를 대할 때 기분이 이상했다. 어떻게 원숭이가 내 조상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이제 나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구나, 생각하니 마음이 평안하다!” 고 말했습니다.
진화론자-인간 기원을 아메바나 원숭이에 두고 단군교(敎) 신자들은 곰에 둡니다. 고․양․부씨들은 제주도 땅굴 속에 둡니다. 박씨들은 말(馬))에서 왔다고 합니다. 그러니 갈수록 짐승 같은 사상과 행동거리가 곰처럼 둔하고 말처럼 걷어찹니다.
성경은 인간의 기원을 하나님에게 둡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영적이고 지혜롭고 지도력이 있는 존재입니다. 문제는 죄가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속성을 죽여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교회를 향해 “죄와 허물로 죽었다” 합니다(엡2:1).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았습니다. 18년 동안 귀신 들린 아이를 볼 때 외형적으로는 꼽추이고 미치광이로 세수한 번 제대로 못하고 사는 짐승 수준이지만 예수님은 그 속에 하나님의 형상을 보시고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자아상(自我像)이 중요합니다. 자아상은 ‘자기가 보는 자기’입니다. 자기를 사랑스런 존재라 생각하면 사랑받을 행동을 합니다. 내가 대통령의 아들이 되면 거기에 맞는 행동을 합니다. 진화론적 자아상이면 동물적 근성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자아상을 가지면 우리는 거룩을 향해 나아갈 것이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품격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웃을 대하는 눈도 하나님의 자녀를 대하는 존경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양자됨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교회에 다니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 분의 인격을 내 것으로 소유함을 뜻합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 속에는 예수의 생명이 있습니다.
이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영생입니다. 우리가 중생할 때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에게 오게 된 것입니다. 그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양자가 됩니다.
㉠ 우선 법적으로 양자가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우리를 부르시고 당신의 영원한 호적에 입적해 주셨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간의 형제자매가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법적인 신분과 관계에 불과합니다. 요즈음 연속극이나 영화에 그런 내용이 많이 나옵니다. 어려서 다른 사람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아니면, 고아로 살아왔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라는 사람이 나타납니다. 법적으로 생물학적으로 아버지가 분명합니다. DNA 검사에서 부자지간 부녀지간으로 나왔습니다. 그래서 성씨(姓氏)가 바뀌고 생활이 바뀝니다. 신분이 달라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관계의 변화, 신분의 변화일 뿐 마음으로는 정이 가지 않고 아버지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 질적으로 양자가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고 우리는 그 분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관계는 종교 이론이나 믿음 안에서 해당되는 부분입니다. 참 마음으로 그 분이 나의 아버지가 되심이 전혀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그때 누가 중개를 해줍니까? 어머니가 해 줍니다. “이 분이 너의 친아버지이다!” 어머니의 말은 누구 말보다도 진실이고 사실입니다. 그리고 조금씩 아버지에게 마음 문을 열게 되고 나중에는 마음속으로 아버지를 인정하며 입술로도 아버지! 라고 부릅니다. 외적인 관계만이 아니라 내적으로도 참 아들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도 이런 관계들이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교리적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시인하지만 마음에 와 닿지 않습니다. 이 때 우리 가운데 오셔서 알려주시고 믿도록 도와주시는 분이 성령입니다. 친부(親父)를 어머니가 말해주고 믿게 하듯 성령은 우리 속에 내재하시면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게 하십니다. 그래서 성령을 “어머니의 영”이라 합니다.
어머니의 영이 우리 속에서 역사 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기 시작합니다. ‘아바’라는 아람어는 “아빠”라는 말입니다. 아빠 엄마는 다정하고 친근한 용어입니다. 이 말 속에는 두려움이나 무서움이 없습니다. 사랑스러움이 배여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하나님을 “아버지!” 하고 따뜻하게 부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직도 신분상으로는 자녀의 되었지만 아버지라 부를 수 없는 것은 양자의 영이 활동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직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질적인 양자의 수준에 올라서지 못한 것입니다.
이승만 정권 시절, 이강석이라는 양자(養子)가 천하를 호령했습니다. 그러나 4.19 혁명이 일어나자 친부(親父)에게 가서 동반 자살했습니다. 양부인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신분상, 호적상, 법적상에 해당되는 것이고 마음은 양부와 하나가 되지 못했습니다. 이승만을 아버지라 부르면서도 아빠라는 친밀한 마음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습니다! 믿음생활을 하면서 아버지라 인정하면서도 참 마음으로 하나님을 “아버지!”하고 부르지 못하는 것은 질적인 양자가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수의 영-성령의 역사가 우리 마음속에 약한 소리를 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살려면 바로 질적인 부자지간이 되어야 합니다.
양자됨의 축복
심윤경은 그의 소설 <달의 제단>에서, 서안 조씨 가문의 17대 종손이 주인공인데 1년에 제사가 열 번도 더 되고 제관이 20명 남짓한 집안-이런 집에 양자 들라니까 아들 셋이 있는 친척도 마다했습니다. 양자가 되면 너무 힘이 드니까! 권세보다는 짐이 더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양자는 다릅니다. 그 특권이 엄청납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했습니다(1:21). 권세는 특권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그 자체가 권세이고 축복입니다.
로마제국시대에 양자 제도가 활발했습니다. 황제들이 양자를 들였습니다. 모세도 여왕 될 공주의 양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 왕의 모든 권력과 혜택이 저절로 굴러왔습니다. 이처럼 양자가 된다는 것은 양자 삼은 사람의 모든 기업과 재산이 양자의 소유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가 될 때, 그 특권은 다음과 같습니다.
㉠ 영생(永生)
하나님께서 영생하시는 분이기에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하나님의 영생을 얻게 됩니다. 이것이 곧 하늘의 기업입니다. 1956년 76세로 세상 떠난 아인슈타인은 아들에게 집과 77,000달러와 애용하던 바이올린을 조건 없이 주었습니다. 아들이니까!
㉡ 하나님의 보호
부모의 책임은 자녀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해 주십니다. 낮에도 밤에도 보호해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하늘나라의 왕자요 공주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하늘아버지의 보호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마음을 평생 갖고 살면 용기가 있습니다.
인생은 육신의 아버지가 전부가 아닙니다. 그분들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한계가 있습니다. 때로는 어두운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하늘아버지는 언제나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여류작가 강유일씨는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었습니다. 남편은 믿음이 좋은 안수집사였습니다. 그 때 두 아이들은 제 기억으로는 7세 미만이었습니다. 남편이 떠난 후에 강유일씨는 하나님께 올린 기도문을 그의 책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에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하나님, 이제 우리 아이들에게는 아버지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십니다. 우리 아이들이 천국에서 제 아버지를 만날 때까지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되어주십시오. 아버지가 필요할 때, 아버지의 위로가 필요하고 아버지의 힘이 필요할 때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되어주십시오.”
하나님만이 영원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그 아버지에게 우리의 자녀들을 맡겨야 합니다. 우리 사후(死後)에 우리 자식들의 삶을 맡겨야 합니다. 이렇게 좋으신 하나님!
㉢ 하나님의 공급
땅에서 사는 동안 하나님께서 좋은 것으로 공급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하나님에게 자꾸 구하십시오. 지혜를, 앞길을, 풍성한 삶을 구하세요! 아버지는 자꾸 구한다고 해서 귀찮아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습니다. 양자에게는 새로운 집이 생깁니다. 우리의 집은 하늘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은 돌아갈 날이 옵니다. 우리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날, 이곳에서는 잘 가라! 고 할 것입니다. 천국에서는 어서 오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담대히 세상 줄을 놓을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면서도 아버지가 없이 교회에 다니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오늘 교회는 행복한 가정이 아니라 고아원이 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목사인 저는 고아원 원장이란 말입니까? 늘빛교회가 영적 고아들로 가득 차 있습니까? 늘빛교회는 고아원이 아니라 사랑이 넘치는 하나님의 집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결코 혼자도 아니고 고아도 아닙니다. 사랑스런 하나님의 아들과 딸입니다. 나를 양자로 삼아주신 그 분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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