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화1(聖化. 거룩하게 하심)
베드로전서 1장 13-17절
서론
영국 성공회 주교 웨스코트 박사가 기차 여행 중에 어떤 여인과 합석했습니다. 전도열심을 가진 여인은 상대방이 유명한 신학자인줄 모르고 “당신은 구원받았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꼭 열정신자들만 아이더라도 우리가 자녀들에게, 학생들에게 물어야 합니다. 구원을 받았냐고? 거듭남을 체험했냐고? 이런 질문이 학습이 되고 반복이 되면서 좋은 신앙교육이 됩니다.
여인의 질문에 웨스코트 박사는 정색을 하고 되물었습니다.
“내게 구원 받았냐고 묻는군요! 과거형(I was saved)으로 묻는 것입니까? 현재형(I am being saved)으로 묻는 것입니까? 아니면 미래형(I will be saved)으로 묻는 것입니까?”
대신학자의 말을 평범한 여인이 알아 듣겠어요? 신학자는 구원을 셋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과거형 구원-이미 받은 구원입니다. 과거에 일어난 구원, 이는 칭의 부분에 해당됩니다.
현재형 구원-현재 진행되는 구원으로 생활, 성품에서 이루어가는 구원, 성화에 해당됩니다.
미래형 구원-장차 영생의 천국에 들어가서야 완성되는 구원으로 영화 부분에 해당됩니다.
여인은 과거형 구원을 물었겠지요. 구원에 대한 확신이 있느냐? 우리가 구원을 말할 때 대부분 이런 과거형 구원입니다. 과거형 구원은 이미 일어난 구원, 우리의 죄에도 취소될 수 없는 구원, 단 한 번에 끝나버린, 완성된 구원을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내 행위와 노력이 조금도 개입되지 않고 100%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받은 것입니다. 이런 구원이 있어 우리는 아직도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의인으로 인정해주시고 칭해주시어 오늘밤에라도 천국에 갈 것입니다. 그게 전부일까요?
바울은 빌립보교인들에게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빌2:12)고 했습니다. 빌립보교인은 이미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 구원을 이루라는 것은 현재형 구원입니다. 과거형의 구원을 받은 자들에게 구원을 이루라는 명령은, 이미 받은 구원을 생활에서 계속 드러내며 살라는 삶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답게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금 구원을 이루고 있는 구원의 생활을 살아가려면 어떤 면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까. 그건 거룩의 면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화를 요구하십니다.
거룩은 오직 거룩하신 하나님에게만 해당되는 신성한 단어입니다. 누구도, 어떤 대상에게도… 거룩하신 황제여… 거룩하신 대통령이시오… 거룩하신 성자님이시여… 이런 표현을 할 수가 없습니다. 거룩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붙일 수 있는 형용사입니다.
성경에서 거룩이라는 단어는 460회가 나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성경은 거룩한 하나님에 대한 거룩한 책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 거룩은, 하나님의 속성 중에 가장 중심입니다.
레위기 11:44,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19:2,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20:26,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하나님은 이처럼 거룩하신 분이면서 양자가 된 우리에게 거룩을 명하십니다.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19:2)
“너희는 나에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를 나의 소유로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레20:26)
살전 4: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거룩은 성도들에게 선택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의 신분과 영을 받는 순간에 이 명령의 순종하에 놓입니다. 그러기에 거룩하라!는 성도에게 첫 번째로 요구되는 명령입니다.
거룩이라는 단어는 ‘구별하다’, ‘분리(구분)하다’는 의미입니다. 죄와 분리, 악과의 분리, 부정, 부패, 세속과 구별되고 변화되어 정결해진 상태, 즉 성별을 의미합니다.
거룩이라는 말을 좀 더 성경적으로 설명하는 단어가 접붙입니다. 거룩하신 예수님에게 접붙임이 된 그 상태, 그래서 예수님에게 소속된 신분과 상태가 바로 거룩한 신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 말씀하십니다. 이는 예수님을 잘 믿어야 성공하고 잘 된다는 뜻보다는 거룩하신 예수님에게 붙어야 우리가 점점 거룩으로 나아가게 되고 이를 신학적인 용어로 성화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화는 거룩하게 되는 과정으로 거룩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기에 점점 하나님을 닮아가는 일,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내는 일이 성화인 것입니다.
구원의 서정 가운데 선택, 거듭남, 믿음, 칭의, 양자… 등은 1회성이고 순식간에 일어납니다. 성화는 평생을 걸쳐서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성화는 예수님에게 계속 붙어있어야 하고 예수님의 거룩을 얼마나 공급받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성화의 수치가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락가락 왔다 갔다 합니다. 그러니 가지가 된 우리는 계속 포도나무에 붙어서 그 수액을 빨고 한 몸이 되기 위한 과정을 평생 게으름없이 지속되어야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에게 아교풀로 붙인 것처럼, 거룩에 밀착되어야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가운데 들어가 친밀한 교제를 누릴 때 거룩한 모양새들이 서서히 나타납니다.
쇠붙이 칼자루가 용광로 깊이 들어갈수록 오래 들어 있을수록 쇠붙이 칼자루는 불자루가 됩니다. 벌겋게 불자루가 되면 이게 칼인지, 불인지 모릅니다. 이게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에 붙어서 거룩해지는 일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 그것은 구속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당신 안에 계시는 것 그것은 성화이다. 당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당신을 천국에 적합한 사람으로 만들어 준다면 그리스도께서 당신 안에 계시는 것은 당신을 이 땅에 적합한 사람으로 만들어 준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당신의 목적지를 바꾸어 준다면 그리스도께서 당신 안에 계시는 것은 당신이 영원한 운명을 바꾸어 준다. 전자는 천국을 당신의 집으로 만들어주고 후자는 이 세상을 하나님의 작업장으로 만들어준다”(얀 토마스)
하나님께서는 성화를 요구할 당연한 권리가 있습니다.
구원 이전에 우리는 죄인이고 탕자였습니다. 서울역 골목에서 구걸하던 꾀죄죄한 어린 소년을 서울시장이 지나가다 데려다가 양자로 삼았다 가정해 봅시다. 시장은 소년을 깨끗이 씻긴 다음 아버지라 부르라 합니다.
아버지… 얼마나 큰 행운입니까? 순간부터, 양자 된 소년에겐 시장의 아들이라는 특권과 함께 의무가 생깁니다. 양자의 신분에게 아버지 시장은 요구합니다. 이제는 서울시장 아들답게 살아야 한다! 이제는 거지 옷을 벗고 단정한 복장을 하고, 서울역 거지소굴에서 나와 시장 관저에서 새 신분답게 행동하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거룩입니다.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 길짐승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11:44-45)
레19:2,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여기서 ‘내가 거룩하니’…는, 하나님의 거룩입니다. ‘너희도 거룩하라’…는, 우리의 거룩입니다.
베드로는 구원받은 우리들, 양자가 된 우리에게 거룩하라고 합니다.
15절,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이것이 현재형 구원입니다. 한국교회가 과거형 구원에 대해서는 바르게 가르쳤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 이런 가르침에 아멘! 하면서 제대로 배웠고 받아들였습니다. 교리에 대해서는 대쪽처럼 곧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구원을 현재에서 완성시키려는 노력, 인격 형성이나 성화에서 성공했다고는 자신할 수 없습니다.
원숭이-진화론자들의 딜레마가 왜 현재의 원숭이들에게는 진화과정이 나타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원숭이가 갑자기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진화론이 맞는다면 진화 과정의 원숭이들 중에서 반(半)은 원숭이, 반(半)은 인간인 변형상태의 단계들이 나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현재의 모든 원숭이에게는 이게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죄인된 우리가 의인의 신분을 얻었다면, 의인되는 과정들이 나타나야 합니다. 과거야 어떻든, 어떤 인간이든, 어떤 삶을 살았든 현재에서 의인의 신분으로의 변화가 삶에서, 현재에서 일어나야 하는데 그리스도인들인 우리는 이런 변화, 이런 영적 진화(進化)가 없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보다 나은 게 없습니다. 이것이 전도의 문을 가로막는 것입니다. 전도의 가장 큰 훼방꾼은 바로 “나”입니다.
“영혼이 중생하는 것은 순간에 일어나는 기적이지만 성자가 되는 것은 평생이 걸리는 과제이다”(영국의 목사 알란 레드새프)
‘평생에 걸리는 과제’이니만큼 성화는 참 더디게 나타납니다. 임신부 중에서도 배가 큰 사람이 있고 어떤 분들은 아예 임신 사실을 모를 정도로 배가 나오지 않는 분들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화도 보이게 나타나는 분들이 있고 성화가 아예 보이지 않는 분들이 있습니다. 성화는커녕 ‘지난날의 나’에서 꼼짝하지 않는 분들이 있습니다. 성화의 1등 단계에서 2등도 아니라 꼴찌 단계로 떨어지는 경험을 하기도 합니다. 그만큼 성화라는 열차는 사람에 따라, 같은 사람이라고 새마을호 성화도 있고 ktx처럼 빠른 성화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 된다.” 하셨습니다.
바울과 같은 사람은 열렬한 예수 대적자였고 예수를 늦게 알고 늦게 믿었지만 초고속 성화를 계속해 나갔습니다. 그래서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4:16, 11:1, 빌3:17)고 합니다. 이건 바울 자신이 자기의 의를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핍박 속에서도 의연함(고전4:16)음식에 관한 본(11:1) 자기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따르는 자신을 본받으라(빌3:17)라는 것입니다.
어떻든 바울은 당시에 상당히 알려진 신앙의 모델이자 대스승이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어린아이고 죄수 중의 괴수라고 자인합니다. 내 안에 두 자아가 있어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롬7:18)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19절),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23절), 결국 낙심에 찬 소리를 합니다.
24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자기 절망입니다! 믿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마음이 좁고 생각이 좁을까, 편협한 사람이 되었을까….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바울은 당당한 한 쪽 줄을 굳게 잡습니다. 그것은 양자의 신분입니다. 그래서 다음 장, 8장에서 이렇게 외칩니다.
35절,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8절,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절,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이거 어디 빼 째 봐라! 죄가 없는 자들은 내게 돌을 던져라! 이런 무데뽀식이 아닙니다. 죄에서도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기에게 양자의 영이 있기 때문에 소리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교리교육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니까 우리의 죄악에도 정죄하지 않으시고,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하지만 사실은 우리가 공적으로 양자가 되었고 공적으로 칭의의 은혜를 입었기에 또한 그게 전제가 되어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어떤 죄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성화되어야 할 부분은 어디입니까?
우리가 어떤 부분에서 조금씩 거룩해야 합니까? 예배? 기도? 표정… 등에서 거룩해야 합니다. 예배하는 일에 거룩한 모습이 아니면 보기에 좋지도 않고 아무래도 거룩한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 믿는 얼굴에서도 거룩이 나타나야 합니다. 사기꾼처럼 보이면 안 되지요.
그러나 바울은 행실에서 거룩한 자가 되라고 강조합니다.
15절,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사람들이 알아볼 수 있는 거룩의 열매는 행실입니다. 행실은 곧 성품에 기초를 둡니다. 성품이 거룩해지만 자연히 행실도 거룩해 집니다. 성품이 거룩하지 못한 상태에서 외모가 거룩하면 위선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상태를 주님께서는 “회칠한 무덤”이라면서 가장 싫어하셨습니다. 다른 것은 다 참아도 외식만큼은 참을 수 없었습니다.
성화가 더디게 이루어지는 것은 성품, 기질에 기초를 두기 때문입니다. 성품은 뼈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 여간하면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육신적인 성품변화가 가능합니다. 우리가 거듭날 때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하나님의 양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양자들에게만 거룩을 주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성품의 변화가 가능합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5장에서 말하고 있는 아홉 가지 성령의 열매는 성화 과정에 있는 이들에게 나타나는 증거물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모두 성품과 관계가 되어 있습니다. 사랑, 희락, 오래 참음, 온유 충성 절제 자비… 등등, 성화는 성품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인격성화입니다. 성품이 성화 되는 만큼 행실이 거룩해져 갑니다. 그러기에 거룩의 장소는 예배당보다 사무실이요 가정이요 미용실이요, 주민자치센터 체력 단련실입니다. 이런 데서 보여주는 나의 모습에서 성화의 모습들이 나타나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생활거룩이요 생활 성화입니다.
구원의 모든 과정들은 즉각적인 변화요 하나님의 일방적인 역사입니다. 그러나 성화는 점진적이면서 평생에 걸쳐서 서서히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박영선 목사는 성화에 관한 ‘구원 그 즉각성과 점진성’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구원은 ‘즉각성’.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는 그 즉시입니다. 그 즉시, 거듭남과 회개와 믿음과 칭의가 동시에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과거형 구원입니다. 구원이 몇 년 걸려서 일어나는 경우도 없고 구원의 오랜 과정도 없습니다. 구원은 일시적이며 1회적입니다. 그래서 즉각성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현재적 구원, 성화는 점진적입니다. 조금씩, 더 조금씩 거룩하게 변화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마치 굼벵이처럼 기어서 조금씩 가는 것입니다.
결론
헨리 할러먼이 성화에 관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성화는 '잊혀진 축복'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행복하기를 원하지만 거룩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성화에 애쓰지 않는 현대인들의 믿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성화가 제대로 된 축복입니다. 천국에서 영화도 비례하기 때문입니다. 천국에서의 상급은 외면적인 것이지만 영화는 내면의 찬란함입니다. 지상생활에서, 상급은 누가 볼 때만 행복하지만 내면의 기쁨은 하루 24시간 누가 봐주나 보아주지 않으나 행복한 것입니다. 영화는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땅에서 성화에 힘써야 영화가 빛납니다.
불교도들은 서로에게 인사를, “성불하십시오!” 이렇게 합니다. 성불(成佛)은, 부처가 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깨달음의 경지를 실현하는 것’을 뜻합니다.
유대인의 인사가 ‘샬롬’인데 진정한 샬롬을 위해서라면 또 하나의 인사 “성화하십시오!” 이렇게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성화는 천국의 영화를 위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모두 성화하세요~
성화2(聖化. 거룩하게 하심)
신명기 30장 11~14절
(본문이 적합하지 않다 생각되면 베드로전서 1:13-17이나 레19:2, 레20:26)
서론
지난주일 성화(聖化)에 관한 설교를 했더니 어느 분이 “너무 어렵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설교 내용이 어렵다는 것이 아니라 성화의 수준이 너무 높아 믿음생활이 부담된다는 뜻이겠지요. 왜 안 그러겠어요? 성화는 일반신자들에게 어울리는 단어가 아닙니다. 성스럽다 거룩은, 하나님에게만 해당되는 신적 단어입니다. 그러니 일반인들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신자들에게 “거룩해라!” “성화로 나아가라”는 요구는 당연히 부담 자체입니다. ‘성직자’라고 하는 목회자들 정도는 되어야 성화의 삶을 살 수 있다 그럴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목회자들도 여러분과 꼭 같아요. 성화 요구에 여러분보다 부담을 더 느낍니다. 목회는 인간관계이기에 여러 상황이 벌어집니다. 엊그제 <크리스천 투데이> 신문에 “화 삭이는 게 신앙의 본? 목회자도 털어놔야 건강해져”라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목회자대상의 설문에서 ‘지쳐 있다’ 답한 이들이 63%, 100명 중에 63명은 지쳐있는 것입니다, 지쳐있고 번아웃된 상태에서 무슨 거룩이 나타나겠습니까?
그래서 성화를 설교하려면 우리 자신들이 참 힘듭니다. 효도를 하지 못한 제가 어버이주일만 되면 효도설교가 힘든 것처럼, 이렇게 사시오! 저렇게 사시오! 이렇게 살지 마시오! 저렇게 살지 마시오! 라는 설교를 하고나면 얼굴이 부끄러워집니다. 그래서 여간하면 거룩에 대한 설교나 효도에 관한 내용은 피해가려고 합니다. 제가 그리 살지 못하니 그런 것입니다.
간디는, 사탕을 너무 좋아하는 아이에게 따끔하게 책망해 달라는 여인의 부탁을 받고 오늘은 그냥 가라, 한 후에 본인이 사탕을 끊고 훈계를 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자신도 사탕을 좋아하면서 아이에게 사탕의 해를 말한다는 것은 위선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성자라는 칭호를 듣는 것입니다. 간디 식으로 설교하려면 다음 주일 이 강단에 서 있는 설교자는 없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거룩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거룩은 짐이 아니다
우리가 이 정도라면, ‘성민’이 되라고 선택된 ‘선민’ 유대인들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레19:2) 말씀에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하나님께서는 열 개의 계명을 주셨지만 유대 조상들은 이를 613개의 항목으로 쪼갭니다. ‘하라’가 248개, ‘하지 말라’가 365개… 십계명을 삶에 확장하는 계명의 조항들입니다. 이 항목이 사람들을 완전히 조여버립니다. “안식일에 일을 하지 말라”는 안식일 명령에서 안식일에는 엘리베이터 버튼도 누르지 못합니다. 수염을 깎다가도 안식일 시간이 땡! 하면 절반만 깎고 그냥 외출해야 합니다, 이런 세밀한 항목이 613개 거미줄 같이 엮어 있어 움직이면 죄가 됩니다. 그러면서도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니 얼마나 조심조심하고 힘들었겠어요?
이런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하리라…”(마11:28)
율법이 그들을 쉬게 하지 못했습니다. 거룩하라는 요구가 선민들을 힘들게 했습니다. 어찌해야 할까요? 하나님께서 백성들 수준으로 낮추어야 할까요? 백성들이 하나님의 거룩 수준으로 올라가야 할까요? 만약에 하나님께서 백성의 수준으로 낮추면 이스라엘은 세속화가 됩니다. 그러니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의 거룩 수준으로 향상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민수기 30장에서 거룩의 수준을 말해줍니다.
11절,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12절,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
13절,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14절,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행할 수 있다”는 것은, 거룩은 부담이 아니라 우리의 세속화를 막아주는 방파제이기에 얼마든지 거룩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우리에게 요구되는 거룩은 종교적인 수준이 아니라 생활적인 수준입니다. 거룩~ 거룩~ 이러니 마치 철없는 아이들이 어른과 같은 점잖음을 요구받은 유교의 가르침처럼 엄청 부담스러워하지만, 거룩 명령은 그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주요 우리를 온전하게”(히12:1) 하시는 분! 믿음의 출발이요 믿음의 마지막! 한마디로, 믿음에서 본(本)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거룩에서도 우리의 본이 되십니다.
예수님의 언행은 의도적으로 거룩 거룩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거룩의 모델인 제사장들과 어울려 거룩 거룩을 말한 것이 아니라 일반인들과 함께 어울렸습니다. 그들은 종교가 거룩하지 못하다고 배척한 창기와 세리,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백성들, 소위 ‘암 하레츠’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죄와 함께 놀았지만 죄와 섞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를 거룩으로 끌고 갔고 그들을 변화된 사람들로 만들었습니다. 결국 생활적 거룩은, 세속화가 되지 않는 믿음입니다.
상식선(常識線)에서 사는 것이 거룩이다.
하나님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명령하신 거룩은, 당장 100% 거룩 상태를 명한 것이 아니라 거룩을 지향하라! 오늘 실패해도 좋으니 방향은 거룩을 향하라는 것입니다.
거룩은 내면적인 거룩, 즉 종교적인 거룩과 외면적인 거룩, 곧 생활 거룩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교적 거룩을 위한 방편이 성막과 십계명입니다. 성막과 십계명은 구원이 아니라 거룩을 위해 주신 것입니다. 성막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장소입니다. 성막에 들어갈 때 제사장들은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합니다. 제사를 드리러 성막으로 갈 때 백성들은 몸을 씻고 깨끗하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외적 거룩이요 종교적인 거룩입니다.
또 하나의 거룩의 방편은 십계명입니다. 십계명을 생활화함으로 이방인과 구별된 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십계명을 지키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유대학자들이 공연히 복잡하게 만들고 어렵게 만들어 자신들의 몸값을 올려버렸기에 힘들어 진 것입니다.
1계명, “나 외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경배의 바른 대상을 말합니다.
2계명,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경배의 방법입니다.
3계명,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경배의 정신입니다.
4계명,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경배의 시간입니다.
5계명,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인간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6계명, “살인하지 말라” 이웃의 생명을 보전하라는 것입니다.
7계명, “간음하지 말라” 이웃의 순결을 보전하라는 것입니다.
8계명, “도둑질하지 말라” 이웃의 재산을 보전하라는 것입니다.
9계명,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이웃의 명예를 보전하라는 것입니다.
10계명,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이웃의 가정을 보전하라는 것입니다.
십계명을 지키는 것이 뭐가 그리 어려워요? 두 신을 섬기는 것이 어렵지 하나님 한 분을 섬기는 것이 왜 어려워요? 도둑질이 어렵지 도둑질 하지 말라는 명령이 뭐가 어려워요! 살인이 어렵지 살인하지 말라는 것이 뭐가 어려워요? 오늘 본문에서도 결코 어렵지 않다 합니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성화는 천사급 성화가 아닙니다. 점점 더 신자됨이요 사람됨으로 나가는 것이 성화입니다. 일반생활에서 상식선에서 사는 것이 성화의 삶입니다. 법을 지키는 일에서나 시민의식에서나 인간관계에서나 상식이 중요합니다. 상식대로 살면 그게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일이고 그게 성화의 길입니다. 서울역 골목에서 구두닦이를 하며 막 살던 아이도 서울시장의 양자가 되어 조금씩 아주 조금씩 신분에 맞게 살면 그게 사람됨이며 그런 상식에서 지난 날과는 다른 성별, 구별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옛날 청량리에서 몸을 팔던 여인이 대법관의 부인이 되었다 가정해 봅시다. 극과 극 아닙니까. 그래도 이제는 대법관의 부인이 되었으니 조금씩 부인의 신분에 맞게 살다보면 흠잡을 데가 없는 대법관 부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됨이며 종교에서는 성화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신분에 맞게 살라! 라는 명령입니다. 거룩하신 분의 양자가 되었기에 십계명을 기준으로, 성경을 기준으로 생활에서 깨끗하게 정직하게 반듯하게 살려고 노력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자연스레 거룩하게 되고 그게 성화의 삶입니다.
말콤 글래드웰의 ‘1만시간의 법칙’이 여기에 해당될지도 모릅니다. 하루에 3시간씩 10년이면 1만 시간! 그러다보면 전문가가 된다는 법칙입니다. 우리들 대부분이 신앙생활에서 1만 시간을 채우고 넘었으니 자연스럽게 성화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화는 점진적인 변화이지 지금 당장 완제품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의 방편을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교적 성화수단으로는 성막을 주신 것처럼, 신약의 성도들을 성화시키는 종교적 방편(수단)을 주셨습니다. 말씀과 기도와 성찬입니다.
-말씀(벧전 1:22)-말씀이 성도들을 거룩하게 합니다. 말씀은 진리이기에 영혼을 맑은 물로 씻어나갑니다. 야고보는, 말씀은 거울의 역할을 한다(약1:23)고 했습니다. 거울의 역할은 내 모습을 보여 주어서 꾸미게 하고, 티를 없애줍니다. 깨끗하게 나가도록 합니다.
-기도(딤전 32:4,5)-거룩을 위한 도움과 결단의 기도와 죄를 뉘우치는 참회의 기도는 심령을 거룩으로 이끕니다. 그러므로 “거룩하게 하옵소서“하는 기도를 많이 드려야 합니다.
-성찬(마 26:26-29)-성찬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희생을 생각하며 거기에 동참하려는 마음을 불러일으킵니다. 성찬은 주님의 거룩을 공급받는 시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십계명을 주어 생활거룩으로 이끄셨던 것처럼 신약 성도들도 말씀과 기도와 성찬이라는 거룩의 토대에서 거룩의 대명사 예수님을 보여주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베껴야 합니다. 설교자는 설교 모방으로 시작합니다. 우리의 거룩도 구원자 예수를 마음에 품고 사랑, 용서, 덮음, 고결한 인격… 이런 것을 정성껏 베껴가야 합니다.
-자기 성찰과 회개가 필요합니다. 가나안땅에 들어선 이스라엘은 걸핏하면 죄를 지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 책망합니다. 그러자 백성들은 울었습니다. 얼마나 울었던지 땅 이름을 ‘보김’이라 했습니다(삿2:4,5). ‘우는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문제는 그 뿐입니다. 더 이상 어떤 액션이 없었습니다. 그 날 이후 우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습관이 되어 버렸습니다. 습관적으로 “잘못했습니다!” 하면서 우는 것 가지고는 성화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한국교인들도 잘 웁니다. 회개하느라! 그뿐입니다. 죄를 짓지 않기 위해 어떤 행동, 뼈를 깎는 자기희생이 필요한 데 그런 것에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성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말씀에 순종하고 복종하는 것이 거룩의 비결입니다. 상황에 맞게 처신하는 ‘부득이하여’(삼상13:12)라는 편의주의(便宜主義)가 아니라 말씀의 원칙에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죽기까지 순종했습니다. 말씀에 대해 이런 순종이 있을 때 믿음은 성화되어 나갑니다.
-당연히 성령님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데 대부분 하나님의 일방적인 역사이지만 성화만큼은 주도권을 우리에게 넘기십니다. 네가 어디 한 번 잘 믿어 보아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제대로 믿지 못한다는 것을 아십니다. 죄의 뿌리가 너무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님께서 도우시도록 하십니다.
성화를 위해 성령님에게 더 많은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내 안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내가 성화되기를 원하시며, 그 영이신 성령이 나를 성화시켜 나간다는 확신이 성화의 길에 들어설 수 있습니다. 이런 인식 없이 성화를 전적으로 내 힘으로만 이루려 한다면 아무리 오랜 세월 신앙 생활을 해도 성화된 믿음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온유함... 이런 성품들이 나에게서 나타난다 해도 타고난 성품이라면 성화의 열매가 아닙니다. 성령 안에서 거룩해져 가는 성품이 더디더라도 성화의 과정입니다. 그래서 이런 성품들을 성령의 열매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령의 도움을 구하면서 예수님을 베끼고 자기희생, 부인, 복종과 끊임없는 회개가 수반될 때 고질적인 육체의 죄성에서 성화가 성장하게 됩니다.
현길언의 단편 ‘흔적’에 불량배 아들이 행패를 부리고 들어올 때마다 아버지는 문기둥에 못을 하나씩 박았습니다. 몇 달 후, 기둥은 못으로 가득 찼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아들이 “웬 못이오?” 시비를 걸 듯 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아들아, 이 못 하나 하나가 네 잘못이란다. 네가 잘못하고 돌아올 때마다 못을 박았다!”
“제가 이렇게 많은 잘못을 저질렀단 말인가요?”
아버지는 슬픈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아들은 박힌 못들을 세어보다 너무 많아 다 셀 수가 없었습니다. 아들이 눈물 흘리며 어찌할 바를 몰라 하자,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울지 말아라, 아들아. 앞으로 네가 착한 일을 하렴. 그러면 하나씩 못을 뽑도록 하자!”
“그렇게 한들 이 많은 못들의 흔적은 어떻게 해요?”
아버지는 기쁜 얼굴로 아들의 손을 잡았습니다.
“아들아, 안심하렴! 죄의 흔적은 예수님의 피가 다 없애주실 거야.”
그렇습니다! 우리는 원죄에서 회개해야 합니다. 이것은 “나”라는 정권에서 “하나님”이라는 정권으로의 정권교체를 말합니다. 이런 회심은 일생에 한 번입니다. 자범죄에 대한 회개는 평생을 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우리의 원죄를 제거해 주시고 날마다 회개할 때마다 지은 죄들을 씻으시고 기억도 아니하실 것입니다. 진심으로 계속되는 회개가 우리 믿음을 성화, 거룩하게 만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거룩을 만들어 보라 주문한 것입니다.
결론
김남준 목사는 ‘게으름’이란 책에서 게으름을 ‘그릇된 자기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이 게으름이 인간의 성화를 가로막거나 지연시킨다는 것입니다. 게으름-그릇된 자기사랑은 희생을, 순종을, 자기 부인을 가로막습니다. 그러니 성화가 더딜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속담에 “유대인이 되는 것은 쉽지만 유대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어렵다”는 말이 있습니다. 구원을 받는 것은 쉽지만 구원받은 생활로 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쉽지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희생과 눈물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과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 예수님의 나의 ‘구세주’되심과 나의 ‘주인’되심… 그 사이의 간극(間隙)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성화. 평생의 과업으로 삼고 끊임없이 전진할 때 점진적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미래의 천국에서 우리의 성화구원은 완성될 것이며 성화의 수치만큼 영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성화를 꾸준히 이루어 가십시오! 성령의 열매들을 맺으십시오! 하나님께서 매우 기뻐하실 것입니다!
'교리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직신학 설교46 구원론] 안식(安息)(요한계시록 14:13) (0) | 2023.03.07 |
---|---|
[조직신학 설교45 구원론] 성도의 견인(堅忍)(예레미야 15:15) (0) | 2023.03.07 |
[조직신학 설교43 구원론] 양자(아들이 됨)(로마서 8:12-17) (0) | 2023.03.07 |
[조직신학 설교42 구원론] 칭의(의롭다하심)(로마서 5:6-11) (1) | 2023.02.28 |
[조직신학 설교40 구원론] 믿음(信仰)(2)(히브리서 11:1~6) (0) | 2023.02.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