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安息)
요한계시록 14장 13절
서론
모든 종교에는 나름대로 절기가 있고 예배일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유대교처럼 매주일 마지막 날을 예배일로 정해서 하루 온 종일 생활을 중단한 채로 수천 년 동안 ‘안식일’을 지켜오는 민족은 흔하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출애굽 이후부터 정식으로 토요예배, 안식일예배를 드렸습니다. 단순히 예배만 드린 것이 아니라 그 날은 온 종일을 안식일로 지키며 하루를 쉬었습니다. 자신들도 가축도 자연도 심지어는 기계까지 쉬도록 했습니다. 안식일은 이스라엘 전역에서 완전한 ‘올스톱’이 이루어집니다.
유대인들은 토요안식일을 지키며 고된 세상살이에서 참 평안과 쉼을 기대했습니다. 그들은 거미줄 같은 종교율법을 지키느라 너무 힘들고 국가가 없이 정부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백성으로 2천년을 유랑했고 지금은 이슬람제국의 한 가운데 놓여 수없이 테러 당하고 테러를 하기도 하고… 건국 이래 긴장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지금도 언제 다시 국가의 영토가 사라져 버릴지 모른다는 염려 속에 놓여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올림픽 같은 데는 관심도 없습니다. 국가를 지켜내는 것은 메달이 아니라 군사력과 돈과 두뇌입니다. 그 외에는 신경을 쓸 겨를이 없습니다. 그들이 살아생전에 소망하는 것은 참된 평안과 안식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수도(首都)의 이름을 예루살렘이라고 합니다. 살렘은 평화이니 “평화의 도시”라는 뜻입니다.
그들의 인사말도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처럼 “샬롬!”입니다. 긴장과 죽음의 위협 속에서 살아왔기에 그들은 언제나 평화와 안식을 꿈꾸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진정한 안식은 올까요? 그렇게도 안식을 원하건만 세상에서의 안식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딜레마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구원을 받기는 쉬워도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구원은 내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받고 싶어서 되는 것도 아니고 받기 싫다고 도망간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은 이미 하나님의 프로그램 속에 놓여 있습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우리를 부르시고 구원의 백성으로 삼아주십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문제는 지금부터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는가? 그리스도인답게 살 수 있는가? 그리스도를 닮아가며 살 수 있는가? “How to living?" 그게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는,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삶은 자기 부인(否認)과 포기, 주님과 멍에를 함께 하는 삶으로 모두 좁은 문이요 좁은 길입니다. 인생의 길이 좁다는 것은 삶의 곤고(困苦)를 말합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세상의 고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절대적인 소망이 있습니다. 세상에서의 아픔과 고통과 눈물과 수고와 힘듦에서 면제되는 그 날, 푹 쉬며 걱정 없이 살아가는 영원한 세상을 신학적인 용어로 안식(安息)이라고 합니다.
안식하는 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통과하는 마지막 과정이자 천국에서의 첫 시작이 안식입니다. 안식(安息)이라는 말속에는 몇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 쉼-쉼은 멈추는 것입니다.
노동에서 멈추고 공부에서 멈추고 고민을 멈추고…. 우리에게는 언젠가 마지막 날에 쉼-멈춤이 있습니다. 삶이 고통스럽고 힘들 때 멈춤에 대한 사전 예약이 없는 사람은 희망이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멈추어버리려고 목숨을 끓습니다. 참된 쉼, 멈춤은 하나님께로부터 와야 합니다. 그래야 참된 쉼의 세계로 나갈 수 있습니다. 스스로 쉼을 앞당기려는 사람들은 오히려 내세에서 쉬지 못하고 고통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 사실들을 모두 인정하게 된다면 자살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 잔다-잠은 모든 것에서의 면제입니다.
어떤 괴로움도 자버리면 끝입니다. 잠은 고민도 번뇌도 돈도 자식도… 침범할 수가 없습니다. 잠이라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입니까?
성경은 죽음을 “잔다”고 표현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은 더 이상 인생의 곤고함이 침입하지 못하는 다른 세상에서의 존재양식을 말합니다.
㉢ 제대 한다-제대는 의무를 다한 사람에게 주는 보상입니다.
군대에서는 별의별 욕설을 듣고 고된 훈련을 받습니다. 이번의 총기살인사건도 욕설을 견디지 못한 일병이 총을 난사했다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저도 이번에 8명이 사망하고 부상하는 참사를 처음 접했을 때 가슴이 쿵! 하더라고요! 그래서 요즘은 군대에 그냥 갖다 오는 게 아니고 참 위험도 있는 곳이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요! 우리 인생도 힘든 나날의 연속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런 고된 삶에서 제대하는 날이 옵니다. 이것이 안식입니다.
㉣ 마차를 끌고 가는 소가 멍에를 내려놓는 일입니다.
달구지를 끌고 가는 소-얼마나 힘들어요. 엔진도 아니고, 자기 힘으로 끌고 가야 하잖습니까? 그런데 소에게도 멍에를 내려놓는 휴식과 안식의 날이 있습니다.
누구나 나름대로 짐들을 끌고 갑니다. 짐 없는 사람이 없어요! 나름대로 이고 가야 하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참 힘듭니다. 요즘에는 경제적인 고통의 지수가 굉장히 큽니다. 그것만이 아니지요. 장애와 함께 평생을 산다는 것도 너무 힘든 일입니다. 가족부양이라는 짐을 지고 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친일파의 후손이 되어서 산다는 것, 그것도 큰 짐입니다. 대한민국에서는 장남으로 산다는 것도 짐입니다. 이런 한 가족이라는 마차를 끌고 가는 장남들이 언젠가는 장남의 멍에를 벗는 날이 오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 앞에 놓여있는 안식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끝은 정지요 해체입니다. 거기에는 고통도 괴로움도 없는 반면에 기쁨도 즐거움도 해방감도 없습니다! 모든 것의 정지입니다. 그런 안식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쉼은 의식이 계속되는 안식입니다. 땅에서의 모든 슬픔에서 면제되고 땅의 수고를 내려놓게 됩니다. 이후에는 하나님 안에서 영원히 쉬게 됩니다. 우리에게 이런 소망이 있습니다. 이걸 믿고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기에 견디는 힘이 있습니다.
안식의 종류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살 때는 천국을 끌어다 사용하고 죽으면 천국 속으로 들어가 거기에서 영원히 안식합니다. 세상을 끌어다 사는 것-이 땅에서 누리는 안식입니다.
㉠ 주일의 안식-주일 하루는 안식을 위해 있는 날입니다. 주일을 소중히 여기고 주일을 아껴야 합니다. 나의 참 안식과 휴식을 위해 주일을 소중하게 선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요즘 웰빙! 웰빙! 합니다. 아늑하고 건강을 생각하고 행복한 삶을 위해서 자연을 찾고 무공해 자연식품을 찾고… 삶의 질을 높이자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진정한 웰빙이 있습니다. 주일에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짐을 내려놓고 수고를 그치고 분노와 염려와 경쟁에서 벗어나 자신을 편하게 쉬게 해 주는 일입니다. 이것이 주일의 참 뜻입니다.
마르바 던은 <안식>이란 책에서 안식의 의미를 네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침-일을 그침, 생산과 성취를 그침, 근심 걱정 염려를 그침, 하나님이 되려는 노력을 그침, 우리의 소유를 그침, 세속적 문화 순응을 그침, 단조로움과 무의미를 그침
*쉼-영적인 쉼, 육체적인 쉼, 정서적인 쉼, 지적인 쉼, 사회적인 쉼
*받아들임-공동체를 받아들임, 요구대신에 주기를 받아들임, 샬롬을 받아들임, 세상을 바르게 받아들임, 소명을 받아들임
*향연-영원(永遠)이 있는 향연, 음악이 있는 향연, 아름다움이 있는 향연, 음식이 있는 향연, 애정이 있는 향연, 축제가 된 향연
-이런 네 가지가 있을 때 주일에 진정한 안식과 휴식이 있게 됩니다. 우리가 주일에 교회 나와 예배드린다고 진정한 안식이 아닙니다. 그침-쉼-받아들임-향연의 날로 주일을 만들 때 진정한 휴식과 안식이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 공동체 서로간의 의무이자 책임입니다.
㉡ 가정의 안식-가정은 하나님께서 주신 안식처입니다.
가정에서 싸우면 안 됩니다. 가정은 피 터지게 싸우는 곳이 아닙니다. 가정은 싸매 주는 곳이고 안아주는 곳입니다. 가정은 경쟁하는 곳이 아니라 서로를 바라보는 곳이고 격려가 있는 곳입니다. 그러기에 가정에서 안식을 누리지 못하면 참된 쉼이 없습니다. 남편의 안식이 없이 아내가 안식할 수 없지요. 아내가 안식하지 못하는 데 남편이 편할 리 없지요. 그러기에 안식은 서로에 대한 존경이자 의무이자 사랑입니다. 가정에서 안식을 누리는 사람들이 성공자입니다.
㉢ 천국에서의 영원한 안식과 쉼-그곳에서는 더 이상 수고와 슬픔이 없습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는 나라, 모든 고통에서 면제되는 나라입니다. 계시록은 그 나라를 말하고 있습니다 (14:13). 눈물이 없고 슬픔이 없는 나라에서 “이제는 쉬라!” 영원한 행복과 기쁨이 있는 곳, 우리가 그 날에 들어가서 안식하게 될 일들이 예수님 안에서 예약되어 있습니다.
죽음은 안식의 입학 과정
안식이라는 천국에 들어가려면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인 엄청난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죽음입니다. 죽음은 육신을 멸하는 것입니다. 왜 육신을 멸해야 하는가? 모든 인간에게는 죄성(罪性)이 있습니다. 죄성은 절대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곳은 거룩한 곳입니다.
영적으로 죄사함을 누렸다 해도 세상은 죄로 오염이 되어있습니다. 방사능이 유출되어 우리가 노출이 되었다면 방법이 없습니다. 그 엄청난 고통은 죽음으로만 제외될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도, 죄로 흉해진 육신은 멸해져야 합니다. 그러기 전에는 고통에서 면제되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육체를 멸했다고 해서 누구나 안식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죽은 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했습니다(히브리서 9:27). 심판에서 통과하지 못한 사람은 영원한 형벌로 갑니다. 거기야말로 온갖 고통과 아픔과 괴롬이 있는 세계입니다. 오죽했으면 성경은 그곳을 “지옥”-지하감옥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죽음이 영원한 안식으로 들어가는 터널입니다. <히랍인 조르바> <예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을 쓴 카잔차키스는 죽음을 노새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노새에 타서 광야를 지나듯 죽음이란 노새에 타서 천국으로 가고 그곳에서 영원한 휴식을 누리는 것이니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종말을 맞아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자기의 죽음을 “내가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딤후 4:6)로 표현합니다. 여기 “떠나다”라는 헬라어 “벗긴다”-동물을 달구지나 멍에에서 벗긴다, 천막의 로프를 푼다, 올가미나 족쇄를 푼다, 배를 정박시키는 로프를 푼다는 뜻이 있습니다. 죽음은 안식을 위해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일입니다.
죽음은 자유롭게 되기 위해 족쇄를 푸는 일입니다. 죽음은 하늘에서 살 곳으로 이사 가기 위해 인생의 천막을 걷어 챙기는 것입니다. 죽음은 세상에 묶어둔 로프를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7절), “너희들에게도!”(8절)라고 합니다.
화란의 인문학자인 에라스무스는 죽음을 앞에 두고 “나는 노병이다. 나는 이제 제대명령을 얻고 있다”고 했습니다. 제대-죽음은 모든 것에서의 제대입니다. 우리도 모든 것에서 제대하고 영원히 쉬며 안식하는 날이 옵니다. 이런 안식을 사모하시는 구원이 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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