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의(의롭다하심)
로마서 5장 6-11절
서론
오늘은 칭의에 관한 말씀으로 어려운 설교입니다. 칭의는, 내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신분이 될 수 있을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인으로 인정해 주시는 길밖에 없다는 요지입니다. 칭의(稱義)는, 일컬을 칭(稱), 옳을 의(義), 하나님께서 죄인된 나를 의인이라 칭해주시고 인정해주신다 것입니다. 그래서 칭의는 법적 용어입니다. 재판관이 일방적으로 “너는 무죄라!” 선언합니다. 대통령이 특사로 “너는 이제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다!”하면 어떠한 범죄자이건 무죄 신분이 됩니다! 칭의는 신분의 영역이고 성화는 인격과 행위 영역입니다.
이런 이야기들이 조금 어렵습니다. 그래도 보드라운 빵만 먹으면 성장하지 못합니다. 성년이 되어가면서 딱딱한 음식으로 길들여져야 치아도 튼튼하고 소화력과 체력, 근력도 생깁니다. 그래야 건강한 어른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영적 음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조직신학 설교 전체가 딱딱한 설교이지만 오늘은 더욱 딱딱한 칭의 교리입니다. 내용 이해가 딱딱하기보다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한 수긍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에 대해 동양사상에서는 맹자의 성선설과 순자의 성악설로 설명합니다. 성선설은 인간은 본성이 선하지만 환
경… 등으로 인해 나빠지나 본성은 선하니 교육 등을 통해 선하게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악설은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악한 본성을 갖고 나온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원죄설은 성선설이 아니라 성악설입니다. 정확하게 성악설도 성경의 원죄설을 반영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악설은 사람의 본성은 악하지만 교육과 종교, 환경 등으로 선할 수 있다는 것이고 원죄설은 인간 스스로는 선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해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타락하고 완전 부패한 존재로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볼 때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실 때 그렇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런 선언을 합니다.
10절,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절,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절,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이건 바울의 주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23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자력으로는 하나님의 영광,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선언입니다.
우리가 영생으로 들어가려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 의로움을 얻어야 하는데 우리에게는 머리끝~발끝까지 의가 없습니다. 죄로 인해 전적부패, 완전 타락한 존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의인은 하나도 없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실만한 의는 하나님께로 와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 의를 전달할 수단으로 이스라엘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임하는 것이 짐승제사입니다. 유대인은 죄를 지으면 짐승 제물로 제사를 드립니다. 짐승이 대신 흘려진 피로 죄가 사해지고 의를 회복합니다.
25절이 그런 이야기입니다.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죄를 간과하심으로… 짐승의 피가 어찌 사람의 죄를 속하고 사할 수가 있겠습니까? 간과는 못 본 척, 죄인이지만 사람만 보지 그의 죄는 보지 못한 척… 그렇게 하면서 자기 백성을 의인으로 간주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짐승 제사는 한시적이고 상징입니다.
25절,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짐승의 죽음과 피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상징하는 것인데 유대인들은 그 상징성을 제거해 버렸습니다. 그림자가 되는 짐승은 상징이 아니라 진짜 실물이라고 우깁니다. 당연히 자기들의 행위를 의의 행위로 자처했고 의인으로 행세하고 만 것입니다. 자력으로 의인을 만들고 자력으로 구원을 얻는 율법 구원, 자력 구원의 자력 종교를 만들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이런 바이러스가 어디로 흘러갔는가, 중세로마교회로 흘러들어가서 갈라디아교회의 행위구원이 반복됩니다. 로마 가톨릭은 영세(세례) 받을 때 의인이 된다, 순례, 고행,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로 의인이 될 수 있다 가르칩니다. 의인이 되는 길을 인간의 자기 행위에 두는 것입니다.
로마가톨릭이 말하는 고행과 수도로 얻게 되는 종류의 의(義)는 그 기준을 인간에게 두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는 미달입니다.
바울이 로마서 10:3에서 말합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20절,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28절,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도 말합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 하나님의 기준 앞에서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면서 당시 세계 최고의 법을 자랑하는 로마인들에게 “모든 사람은 죄인이다!”고 합니다(23절). 인간은 본질 자체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죄인 아담이라는 한 혈통(족보)에 속한 자들은 모두 죄인의 신분이 됩니다. 이런 신분은 자기 행위로 의인 될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아무리 착한 일을 하고 교양 있게 살았다 할지라도, 노예 신분처럼 죄인이라는 신분은 벗을 수가 없습니다.
어떤 의사가 국법을 어기고 해적들의 섬으로 도망 쳤다고 합시다. 의사는 정성으로 해적들의 병을 고쳐주고, 선한 일을 했습니다. 해적들 사이에서 그는 의인이고, 자신도 의인이라 자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왕의 입장에서 볼 때, 그 의사는 국법을 어긴 죄인에 불과합니다.
인간의 운명이 그렇습니다. 모든 인간은 상대적인 선을 갖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인간들끼리 상대적으로 선할 뿐입니다.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의인으로 인정받을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은 너무 높은 수준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의 눈에 완벽하게 보이는 선인(善人)도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들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어떻게 의(義)를 얻을 수 있을까?
그렇다면, 어떻게 의를 얻고 의의 신분이 될까요? 인간 자력으로는 의인이 될 만한 여건이 전혀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만이 죄인이 의인이 되는 한 가지 방법을 마련하셨습니다.
21절,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22절,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방법, 예수님을 통해 죄인이 의인이 되는 길입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하나님의 의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차별이 없습니다! 덜 죄인이든 완전 죄인이든 차별이 없습니다. 바리새인이든 창기 세리이든 차별이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대속의 피를 흘리신 예수님을 구원자로 영접하면 의인이 됩니다. 여기에는 인간 행위가 전혀 개입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의(義)는 사람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와야 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제시된 의의 방법-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죄사함을 입고 의인이 신분이 되고, 구원 얻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할 때, 하나님께서는 의의 옷을 주시며, 입히십니다. 이런 의(義)의 옷만이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대 앞에서 바로 서게 합니다. 하나님의 의가 아닌 자기 자신의 의는 마치 범죄 한 아담 부부가 무화과나무로 자기의 수치를 가리려했던 행동과 비슷합니다. 무화과는 하루면 시들고, 아담 부부의 수치는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인간이 의롭다고 내놓았던 선한 행위들이 하나님 앞에서는 이처럼 보잘 것 없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
에덴에서 죄를 지은 아담의 수치를 가려주기 위해 하나님은 짐승을 잡아서 얻어진 가죽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가죽옷을 입을 때 그들의 수치는 가려지며, 짐승의 피는 아담 후손의 죄를 도말해 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예표 한 것이 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서는 이 사실들을 자세히 적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효과있게 부르신 이들을 또한 값없이 의롭게 하셨는데, 이는 그들 안에 의를 주입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들을 의롭다고 간주하자고 용납하심으로서 의롭게 하셨다. 그들 안에 무엇이 일어났거나 그들이 무엇을 행하였기 때문이 아니고, 다만 그리스도 때문에 그들을 의롭다고 간주하시고 용납하심으로서 의롭게 하셨다. 또한 신앙 절차나 신앙의 행동이나 그밖에 어떤 복음적인 순종을 의로운 것으로 보고 그들에게 돌림으로서 그들을 의롭게 하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하여 순종하신 행동과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킨 행동을 그들에게 돌리심으로써… 그의 의를 얻게 된다. 이 믿음은 그들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에게 ‘의가 주입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들의 죄(원죄)는 예수님의 보혈로 씻김 받았습니다. 원죄는 보혈의 피로 한 방에 완전 사함, 완전 삭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우리 한 번 용서해 주신 원죄에 대해서는 기억도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대할 때마다 항상 의인이라 칭해주시고 의인의 신분으로 대해주십니다.
그렇지만 죄에 대해서는 이게 전부가 아닙니다. 원죄는 사함을 받았지만 아직도 죄성이 남아 있어 죄를 짓고 유혹에 넘어 갑니다. 이걸 자범죄, 혹은 본죄라고 합니다. 죄에 허덕일 때마다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로다”라는 탄식이 나옵니다. 이런 우리들, 형편없는 우리들을 대해서도 하나님은 계속해서 의인이라 선포하시며, 의인으로 ‘간주’해 주십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 때문이 아닌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관계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의인의 기준은 사람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의인이라 선언하시고, 의의 옷을 그에게 입혀주며 의인으로 간주한다면 그는 의인입니다. 아무리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죄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의인으로 간주하신다면 그는 의인의 신분이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때에 유대인이 모두 정걀헤서 죽음의 사자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들도 애굽인들처럼, 잡족들처럼 여전이 죄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들을 살려준 것은 문설주의 어린양의 피입니다. 그 피를 보고 죽음의 사자가 유월한 것입니다. 분명 문설주 안의 인간들이 죄가 있음에도 피를 보시고 죄들은 보지 못한척하시면서 ‘간과’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여전히 문설주 안에 있는 이들을 거룩한 백성으로 ‘간주’하십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전히 죄가운데 있었지만 죄는 간과해 주시고 죄인은 의인으로 간주해 주셨기에 살아남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칭의교리의 모델입니다.
우리가 이런 사실을 놓친다면 입으로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하면서도 실상은 선행으로 구원 얻으려는 행위론자들이 되기 쉽습니다. 그들은 죄를 짓게 되면 지나치게 절망해 버립니다. 그 절망이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한다면 좋은 일이지만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지게 하는 좌절이라면, 그 양심의 가책은 사단에게서 옵니다. 우리의 의(義)로 구원받을 수 없는 것처럼 우리 죄로 정죄 당하지도 않습니다. 아울러 인간의 의는 결코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간주해 주심’의 은혜만이 의인의 신분으로 설 수 있는 것입니다.
왜 죄인들에게 칭의의 은혜를 내리실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의를 요구하지 않고 칭의의 은혜로 덮은 것은, 왜 그런 것일까요?
1) 우리 스스로에게는 죽었다 깨어나도 의가 생성될 수 없고 의인의 신분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불순종의 죄로 인해 본성 자체가 완전 부패된 상태로 태어나고 살아갑니다. 스스로 의를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끼고 자랑할 만한 걸작품입니다.
그러나 죄로 인해 걸작품이 아니라 졸작품입니다. 그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창조의 역사가 실패한 것으로 놔두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일부를 구원해 주기로 예정하셨고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의 몫으로 선택했습니다. 선택된 이들을 때가 되어 부르시고, 그들의 죄는 간과해 버리고 의인으로 간주해 주십니다. 성령님을 보내서 칭의의 사실을 알려주시고 성화를 통하여 자기 백성으로, 에덴에서 빛나던 그 형상으로 회복시켜 주십니다. 칭의의 은혜가 아니면 인간은 결코 의를 취득할 길이 없기에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덮으시며 의롭다 선언하시고 의인으로 대해주시는 것입니다.
2) 성부와 성자 사이에 맺어진 ‘구속의 언약’에 근거합니다.
성자께서 성육신하시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그 피에 덮힌 사람들에게는 그의 행위와 죄악에 관계없이 무조건 의인이라 칭해주겠다! 그렇게 약속을 받아놓고 성육신과 십자가에서 죽으셨기에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를 영접하면 그에게 피뿌림이 있고 피의 옷이 입혀짐으로 하나님께서 죄의 유무와 관계없이 의인이라 칭해주시는 것입니다.
3) 천국에서의 하나님의 은혜만 높이기 위함입니다.
내 의를 조건으로 천국에 간다면 내 의를 자랑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곳은 이미 천국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믿음으로 의의 옷을 입게 되었고 하나님의 은혜로 의인으로 간주함을 받게되었으니 여기서도 감사~ 죽어서는 더 큰 감사입니다. 우리에게는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칭의는 생애 중에 단 한번 일어납니다. 이런 신분상의 변화로 우리는 완전한 의인의 자리로 옮깁니다. 어떤 죄를 저질렀어도,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고, 인간 편에서도 죄인이라 해도 신분상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의인 선포가 우리의 선행에 기인된 것이 아니라면 우리 악행이 의인 포기의 원인이 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이 독일군과 전쟁하다 전사했습니다. 동료들은 그를 교회의 공동묘지에 묻기를 희망했습니다. 그러나 신부는 영세를 받지 않고 죽었다는 이유로 거절했습니다. 동료들은 눈물을 흘리며 공동묘지 울타리 바로 옆에 묻었습니다. 며칠 후, 동료의 무덤을 찾은 군인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무덤이 공동묘지 안으로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무덤을 옮겼을까요? 아닙니다! 신부가 울타리를 밖으로 넓힌 것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난 일이 그런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요구하시는 완전의 기준에 절대 도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을 우리 대신 예수 그리스도가 완벽하게 성취하셨습니다. 그래서 의인으로 인정받는 것입니다.
루터는, 갈라디아서 강해에서(1519년) ‘즐거운 교환’이란 말을 처음 사용했습니다. 십자가에서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의가 교환되기에 그것은 즐거운 거래라는 것입니다. 루터는 말합니다.
“우리와의 이 즐거운 교환으로 그 분은 우리의 죄된 인격을 자신에게 입히시고 자신의 무죄하고 승리하시는 품격을 우리에게 허락하시었다. 이것을 입고 단장한 우리는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되었다.”
십자가는 신비한 교환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인간에게는 항상 이익이 되나 하나님께서는 항상 손해가 되는 거래이면서도 십자가의 장터에서는 아름다운 거래가 이루어집니다. 십자가에서는 독생자와 죄인이 서로 교환되는 곳입니다. 그래서 의인인 우리가 적어도 하나님 앞에서는 의인의 신분으로 대접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칭의의 은혜가 임했기 때문입니다.
결론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의(義)에 관하여 한 가지 비유를 남기셨습니다(마22장). 왕이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잔치에는 누구나 초대되었습니다. 아무나 와도 됩니다. 왕은 초대된 사람들을 살펴보다 한 사람에게 진노했습니다. 그는 예복을 입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 풍습은 잔치 초대를 하는 주인은 초청장만 아니라 그에 맞는 예복도 함께 보냅니다. 그 사람은 왕이 보낸 예복을 입지 않고, 자기가 아끼는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예복을 입었던 것 같습니다. 왕은 그 예복에 대노하여 그 사람을 쫓아내었습니다.
자기의 예복이 곧 인간의 의(義)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인간의 행위가 더러운 옷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사64:6). 인간이 자기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의 행위에 의지하는 자가 아니라 예수님을 영접하여 의인이라 간주함을 받아야 할뿐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처음부터 나중까지 은혜의 종교입니다. 칭의는 은혜의 중심에 서 있는 교리입니다. 칭의 신분으로, 당당하게 한 편으로는 늘 겸허하게 살면서 성화의 길로 나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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