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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설교

[조직신학 설교38 구원론] 회개(1)(마태복음 3:1,2, 4:17)

by 조직신학 교리설교 2023. 2. 21.

 
 
회개(1)

마태복음 3장 1,2, 4장 17

 
<서론>

지난 번 두 주일에 걸쳐 거듭남(重生)에 대해 말씀을 전했습니다. 거듭남(regeneration. born again)은 영생하는 하나님의 생명이 이식(移植)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은 사람은 성령으로 영생이식 수술을 받았습니다. 몇 날, 몇 시에 언제 받았는지, 거듭났는지를 아는 분들도 있지만 99.9%는 거듭나는 순간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체험하지 못합니다. 거듭남은 나와는 관계없이 성령님의 단독 소관이기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일어납니다.

전기스위치를 올리니 전등불이 빛나고 안방 보일러가 돌고 텔레비전이 켜지는 상황이 발생하듯이 성령으로 거듭나면서 영생의 생명이 내 안에 착지(着地)가 되면 생명이 성장하기 위한 일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합니다. 회개와 믿음과 칭의입니다. 

 

세 가지 구원의 서정은 어느 것이 먼저 일어난다, 할 수 없이 동시에 일어납니다. 거듭난 생명에게 왜 세 가지 서정-회개, 믿음, 칭의가 동시에 일어나야 하는가? 거듭난 생명에게 꼭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거듭난 생명의 성장입니다. 성장하지 않는 생명은 잘못된 것입니다. 성장하는 믿음에 날마다 회개가 있어야 깨끗한 믿음이 됩니다. 여기에 칭의는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하심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에 은혜가 계속 자라지 않으면 자기의()에 빠져서 가장 해악한 믿음, 비은혜의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거듭난 생명이 정상적으로, 건강하게 잘 자라기 위해서는 회개와 믿음과 칭의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회개부분을 먼저 다루겠습니다.

 

예수님의 첫 메시지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첫 메시지로 고민했을 것입니다. 제가 40년 전에 교회를 개척했을 때 첫 설교에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교인들이 아무도 없었으니 고민할 것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열심히 준비해서 열심히 설교했습니다. 평소 알고 지내던 타교회 집사님 부부가 참석해 주었지만 그 날은 스스로에게 하는 설교. 나 자신에게 늘빛교회를 왜 개척했는가, 라는 정체성을 분명히 해두고 싶었습니다. 고심 끝에 택한 본문이 이사야 60:1,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빛이 되는 교회, 누군가에게 등불이 되는 교회, 그 설교에 제 목회관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첫 메시지는, 17,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회개(悔改)였습니다. 세례 요한도 광야에서 사역을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외친 첫 메시지는 회개하라~” 입니다(3:1,2). 말리기 선지자 이후에 세례요한과 예수님 오시기까지를 구약과 신약 사이 400년 공백을 중간기 시대라고 합니다. 중간기 시대의 특징은 하나님의 침묵이었고 선지자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때가 되어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기 직전에 요한을 먼저 보냈고 요한은 회개를 외쳤습니다. 요한의 회개와 예수님의 회개는 같은 것 같은데 다르고 다른 것 같은데 같습니다. 요한은 행위의 회개를 강조하고 예수님은 근본적인 회개를 강조합니다!

두 사람 모두 첫 메시지치고는 인기 없는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은 종교국가(신정국)입니다. 아무리 죄를 지어도 세상 사람들만큼 죄를 지었겠어요? 유대인에게 필요한 것은 해방과 회복, 축복과 위로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런 신정국가 동족들을 상대로 회개를 외치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사명을 알았습니다. 자신은 해방자도, 사회복지사도, 의사도, 단순한 위로자도 아닙니다. 당신은 구세주, 구원자입니다. 무엇으로부터의 구원입니까? 출생시에 천사가 미션을 알려주셨습니다.

 

이름을 예수라 하라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1:21)

 

! 죄에서 구원을 얻으려면 본인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환자는 자신의 몸에 수술해야 할 이유가 있음을 알아야 수술을 받고 건강한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청중들에게 죄인된 신분임을 먼저 알려주고 구원의 여정을 시작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회개의 의미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회개의 의미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 그릇된 천국관에서의 회개입니다.

 

 유대인들은 천국을 지상에 세워지는 국가로 알았습니다. 그러니 모세나 다윗 같은 정치적인 메시아를 기다리게 됩니다. 그래야 로마제국을 물리치고 독립된 유대 왕국을 건설할 수 있으니까요. 지상천국의 입성 자격은 유대인이 우선입니다. 아브라함 자손은 무조건 천국시민이 됩니다. 혈통이 선민이고 율법을 충실히 이행하는 자들입니다. 유대인 중에는 지옥으로 떨어질 자는 한 명도 없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조상 아브라함이 지옥문에 서 있다가 후손들이 들어가려 하면 막아선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이것은 왜곡된 선민의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만드실 적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계획을 계시, 보존, 계승, 전파시키려는 의도였습니다. 그런 의도가 선명하게 부각될 수 있도록 성별된 삶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래야 열방 중에서 돋보이게 되며 하나님의 섭리가 강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의지를 엉뚱하게 오해했고 그 오해가 바로 앞에서 말한 그릇된 등식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사실을 관통하셨습니다. 이스라엘에게 회복되어야 할 것은 주권과 영토가 아닙니다. 족장 조상들이 가졌던 참 믿음입니다. 참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신 구원의 도리를 수용하는 자세입니다. 그것은 율법이나 선행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며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표현되었다)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겸손한 자세로 살아야 하는데 선민의식에 빠져 교만해졌고 선민의식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녀야 할 바른 자세를 무디게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최악의 상태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을 향하여 회개를 외치셨던 것입니다. 잘못된 천국관에서 속히 돌아서라는 것입니다.

 

둘째, 잘못된 구원관에서의 회개입니다. 

 

선민 유대인들은 어려서 율법을 지켜 왔기에 의인이라는 것, 의인이기에 당연히 구원 받는다는 것! 이런 민족적 착각에 빠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자기의()에 두고 있는 구원관에서 회개하라는 했지만 유대인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의 오해는 우리에게서 계속됩니다. 회개에 대한 설교를 들으면 외부적 허물부터 찾으려 합니다. 그래서 일단은 내 허물을 생각하고 그릇된 습관에서 잘못을 찾기에 급급합니다. 이것은 2 3번에 해당되는 것이지, “회개하라!” 하신 말씀에 대한 답이 아닙니다. 회개는,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는 자세를 고치는 일이요, 주권자 판단자 자세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악과’, ‘선악과 하는데 사실 성경에 선악과라는 단어는 없습니다. 생명나무와 대칭상태에 있는 나무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2:9)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임을 알려주는 나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정작 그 나무가 어찌 악의 대명사가 되고 만 것입니까? 문제는 선과 악의 개념을 내가 정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에 진리가 실종되어 있습니다. 우리 편이면 모두가 선이고 저쪽 편이면 모두가 악입니다. 선과 악은 내가 정하고 우리가 정하고 있는 이런 현실이 바로 선악과를 씹는 모습입니다.

 

주님께서는 선과 악을 내가 결정하면서 구원조차도 내가 선행을 쌓으면 나를 구원할 수 있지 뭐 하는 나쁜 구원관에서 회개하라, 마음을 고쳐먹고 돌아서라는 것입니다.

 

셋째, 잘못된 행동에서의 회개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행위의 회개입니다. 회개는, 중생한 영혼이 자신이 죄악의 자리에 앉아 있고 죄악의 길에 서 있음을 인식하고 심히 애통해 하며 죄의 길에서 떠나 하나님을 향하여 돌아서기 시작하는 마음과 생활의 변화입니다. 주님께서 회개하라!” 하심은, 너희는 선민이지만 성민(聖民)으로까지 살지 못하고 있다! 거룩하지 못한 삶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이미지를 왜곡시키고 있다! 

 

그러기에 손과 발을 씻고 새 사람이 되고 거룩한 삶을 회복해서 하나님을 제대로 세상에 전달하는 거룩한 백성으로 살라! 그러려면 행위로 회개를 보이라! 자범죄에서의 회개를 요구한 것입니다. 우리가 거듭나고 거듭남이 성장하게 되면 저절로 따라오는 당연한 회개들입니다.

 

<소요리문답> 87항은 회개의 참된 의미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생명에 이르는 회개는 곧 구원 얻는 은혜인데, 이로 말미암아 죄인이 자기 죄를 참으로 알고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깨달아 자기 죄를 원통히 여기고, 미워함으로 죄에서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든든하게 결심하고 새로이 순종하는 것이다.”

 

이처럼 예수님의 첫 메시지는 회개하라!”입니다! 회개하라는 첫 메시지는 사람을 불러 모으고, 호감을 사는 일에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누구나 솜사탕과 같은 말에 귀가 솔깃! 합니다. 지금도 복, 을 말해 주는 달콤한 설교에 사람들이 몰립니다. 거북하고 양심이 찔리고, 듣기에 편치 않는 강단에는 사람들이 몰리지 않습니다. 오죽했으면 왈벗 빌만이 강단이 예수와 가까워지면 신도들이 줄어들고 강단이 예수와 멀어지면 신도들이 늘어난다.”라고 탄식했겠어요! 물론 교회가 성장한다고 강단이 세속화되었다고 비판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른 말씀 가운데 성장하는 교회가 있고 세속화된 설교를 하면서도 부흥하지 못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다시 회개하라! 일갈하시는 예수님에게도 돌아가면, 예수님은 청중들을 모아 교주가 되는 일에 관심 없었습니다. 12명 제자를 선택하고 훈련을 시켜 바른 복음이 전 세계에 전파되어 참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원하셨습니다. 영혼 구원이 우선이었습니다. 그래서 메시지는 대중 영합이 아니라 오히려 대중들의 영적 불감증을 공격하는 내용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예수님은 유대 교권자들과 뭔가 코드’(?)가 맞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회개

 

회개의 출발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시작되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15장은 회개와 관계된 유명한 예화입니다. 집을 떠났던 탕자(둘째아들)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라고 합니다. 하늘은 하나님입니다. 거듭남은 하늘로부터 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오니 그제야 하나님이 보이고 나는 죄인이구나를 인정하게 됩니다. 그래서 돌아서는데 돌아섬은 회개가 아니라 회심입니다. 

 

회개가 죄 자체에 대한 절망적 탄식이라면, 회심은 생각의 변화’, ‘마음 방향이 바뀌는 것입니다. 탕자는 아버지를 떠났던 자리에서 돌아가는 자리로, 나만 생각하던 자리에서 아버지의 심정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방향을 전환합니다. 아들의 도리, 사람의 도리를 하지 못하고 이기적이었던 잘못된 생각을 뉘우칩니다. 이것이 회심입니다.

 

이처럼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비롯됩니다. 지금까지는 내가 괜찮은 존재로 알았습니다. 내 힘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 생각했습니다. 바르게 착하게 살고 적당하게 남을 도와주고 그러면 좋은 곳에 가지, 내가 특별히 죄를 지었나? 나쁜 짓을 했나? , 이렇게 살면 되는 것이지 그러나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게 되면 먼저 하나님을 향한 통곡부터 나옵니다. 사람들에게 죄를 지었어도 하나님을 향해 대성통곡을 합니다. 회개는 사람에게 지은 죄부터 시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출발이 됩니다. 물론 사람에게 지은 죄가 계기는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내 자아에서 살아온 내 중심의 삶이 죄입니다. 가장 큰 죄는 라는 단어에 있습니다. 그래서 회심을 정권교체라 합니다. 내 중심적인 삶에서 하나님 중심적인 삶으로! 내 정권에서 하나님의 정권으로 교체되는 것! 그래야 거듭남이 살아 움직입니다. 거듭남이 움직이지 않으면 절대로 원죄를 인정할 수 없고 죄에서 벗어날 수도 없습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회개

 

하나님과의 관계가 개선되면 인간관계에서 회개해야 합니다. 작은아들은 내가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사람에게 지은 죄를 인정하고 뉘우칩니다. 죄의 회개는 내 잘못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비롯됩니다. 내가 지은 잘못 자범죄는 날마다 씻고 떼어내야 합니다. 입으로만의 뉘우침이 아니라 자신을 늘 성찰하고 반성해야 합니다. 행동으로 드러날 때 회개는 삶을 변화시키는 작동을 합니다.

 

작은아들이 돌아오자 아버지는 용서해 주었습니다. 좋은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이런 일로 신분이 회복되었지만 전부가 아닙니다. 이제 생활로서 아버지의 아들로 인정받아야 합니다. 더 열심히 일하고 더 형을 위해야 합니다. 돈에서, 재산에서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그런 노력도 없이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찬송이나 부르면서 회개했다고 한다면 진정한 회개가 아닙니다. 이런 회개의 마음 밭에서는 구원의 생명이 자라날 수 없습니다.

 

회개는 뉘우침입니다. 회개는 아프고 비참하고 자존심이 상하고 슬픈 것이지만 회개는 믿음의 건강성, ‘하나님 형상으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길입니다. 이런 회개가 없이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치명적 균이 있어도 도려내지 않고 봉합하는 격입니다. 그래서 원죄적인 회개와 자범죄에서의 회개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과목입니다. 성화를 이루어가는 도구이기도 한 것입니다.

 

결론

 

워터게이트 스캔들의 중심에 서 있던 찰스 콜슨은 감옥에서 회심을 했습니다그는 감옥에서의 회심을 바탕으로 ‘다시 난다’(Born again)는 책을 섰습니다그는 출옥한 이후에도 교도소 선교를 했습니다지금도 계속하고 있습니다그야말로 진정한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중생한 자들은 죄와는 아주 멀어진 상태가 될까요죄를 아주 끊어버리는가요여기에 대한 답은 두 가지입니다성령훼방죄예수를 부인(否認)하는 결정적인 죄는 짓지 않습니다그러나 일반적인 생활의 죄는 범할 수 있습니다많이 짓던 죄에서 작게 짓는 죄로죄를 은근히 즐기던 자리에서 죄 지을 때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부끄러워하는 이런 단계로 조금씩 향상되게 됩니다이런 단계가 바로 성화(聖化)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회개는 다음 시간에 한 번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회개할 것이 더 많아서 그럴까요?

 

[참조 설교]
[김명혁 목사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과 역사로만

 51:17, 4:17, 24:47,48, 7:18,19,24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회개와 참회의 삶으로 시작하고 회개와 참회의 삶으로 지속되고 회개와 참회의 삶으로 마무리된다고 생각합니다. 성자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제일 처음에 전파하신 말씀이 바로 회개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4:17).

성자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부탁하신 말씀도 회개의 메시지를 세상에 전파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24:47,48).

사도 베드로가 오순절 날 제일 먼저 전한 설교도 회개하라는 설교였습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2:37,38).

사도 바울이 소아시아 선교지에서 전하고 가르친 것도 회개와 믿음의 도리였습니다. “저희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20:18,20,21).

 

회개 없이는 천국도 없고 죄 사함도 없고 구원도 없고 성령도 없다는 말씀들입니다. 회개는 한 번 크게 삶의 방향을 돌이키는 것을 말하고 참회는 계속해서 울면서 돌이키고 또 돌이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한 번 돌이키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계속해서 울면서 돌이키고 또 돌이켜야 합니다.

지금 우리 한국 교회와 사회에 가장 필요한 것은 회개와 참회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한국 교회 안에 길선주 목사님과 이기풍 목사님과 이성봉 목사님과 김치선 목사님께서 하셨던 회개와 참회가 있다면 한국 교회는 오늘의 한국 교회와 사회를 살리는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한국 사회와 정치 안에 모두가 내 탓이고 내 잘못이고 내 부덕의 소치라고 말하는 회개와 참회의 지도자들이 일어날 수 있다면 오늘의 한국 사회와 국가는 희망찬 사회와 국가로 발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회개와 참회의 제사를 드린 믿음의 선배들의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들도 저들의 발자취를 따르게 되기를 바랍니다.

 

1. 다윗

첫째로 회개와 참회를 가장 많이 가장 처절하게 한 사람이 다윗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은혜와 사랑을 입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 받으시는 제사는 회개와 참회의 제사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회개와 참회의 시 다섯 개가 시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편 6323851143편이 다윗의 회개와 참회의 시들입니다. 제가 매일 읽는 시편 51편에서 다윗은 이렇게 처절하게 회개하며 참회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51:1-10,17).

다윗은 날마다 눈물로 침상을 적시면서 참회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6:6).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56:8).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진솔하고 처절한 회개와 참회의 제사를 기뻐 받으시고 다윗을 아주 귀하게 사용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가리켜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시기까지 했습니다.

 

2. 바울

둘째로 사도 바울도 다윗의 뒤를 이어 처절한 회개와 참회를 계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를 귀중한 종으로 사용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를 표현하면서 자기 실패와 자기 멸시와 자기 비하의 표현들을 거리낌 없이 진솔하게 사용했습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7:18,19,24).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고전 2:3).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아무 것도 아니로다”(고전 3:5,7).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도다”(고전 4:13).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고전 15:8,9).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3:8,9).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라고 고백한 사도 바울의 처절한 참회의 고백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귀중한 종으로 순교의 제물로 받으셨고 그리고 사도 바울의 이 처절한 고백 때문에 성 어거스틴과 길선주 목사님과 이기풍 목사님도 같은 참회의 길을 걸으면서 하나님의 귀중한 종들로 쓰임을 받으셨다고 생각합니다.

 

3. 성 어거스틴

셋째로 성 어거스틴이야말로 처절한 회개와 참회를 평생토록 계속한 사람이었습니다.

어거스틴이 개종한 후 11년 되던 해인 397, 그가 43세 되던 해에 저술한 참회록은 어거스틴의 지극히 낮아진” “비관적인” “참회의모습을 잘 드러낸 작품인데, 어거스틴의 전 생애의 내면 생활의 변화 과정을 적나라하게 파헤쳐 묘사한 영혼의 자서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갓난아기 때 어머니의 젖을 게걸스럽게 빨던 탐욕과 시기가 가득한 자신의 모습을 비롯하여, 십대 소년으로 남의 집 배나무에서 배를 몽땅 털어 따서 돼지에게 던지며 좋아하던 장난꾸러기의 모습 그리고 정부와 동거하다가 그를 내버리는 육욕에 얽매여 있던 청장년 시절의 방탕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묘사했으며 마니교, 신플라톤주의 등을 추구하다가 결국 롬 13:13을 읽고 극적 회심을 경험한 회심 사건과 카시키아쿰에서 은거의 생활 등 자신의 내면 생활을 솔직하게 묘사했습니다.

그는 참회록1권 초두에서 자신의 모습을 하나님 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냈습니다. “그러면 제가 말씀 드리겠습니다. 먼지와 재와 같은 제가 말씀 드리겠습니다. 제가 말씀 드리는 것은 사람에게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저를 조롱할 사람에게 드리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긍휼을 바라보고 말씀 드리옵니다.”

그는참회록102장에서 개종 후의 자기의 내면상을 아직도 갈등과 어두움에 싸인 불완전하고 무능한 존재로 묘사했습니다. “, 주님이시여! 내 속에 있는 것을 어찌 당신에게 숨길 수 있나이까? 나는 내 자신에게 만족을 느끼지 못하므로 아직껏 탄식하고 있나이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 부끄러워하며 나 자신을 거부하고 당신을 택하옵니다.”

어거스틴은 참회록1028장에서 자기 내면의 병들고 추한 모습을 다음과 같이 진솔하게 묘사했습니다. “나는 망할자이옵니다. 주님이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의 악한 슬픔이 나의 선한 기쁨과 싸우고 있는데 승리가 어느 편에 돌아갈지 나는 알지 못합니다. 나는 망할자이옵니다. 주님이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망할자이옵니다. 보시옵소서 나는 내 상처를 감추지 않습니다. 당신은 의사이시며, 나는 병든 사람입니다. 나의 모든 소망은 당신의 넘치도록 크신 자비에만 있습니다. 당신이 명하시는 것을 나에게 주시옵소서 그리고 당신이 원하시는 것을 나에게 명하시옵소서.

분명히 당신은 내가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부터 벗어나라고 명하십니다. 당신은 음란을 삼가라고 명하십니다. 그러나 아직도 내 기억 속에는 나의 옛 습관이 고착시켜 놓은 그와 같은 것들에 대한 영상이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그와 같은 영상이 내 속에 들어와 나에게 즐거움을 제공할 뿐 아니라 나의 동의를 얻어내고 그리고 실제 행동과 매우 유사한 행위를 유발하고 맙니다. , 주 나의 하나님이시여! 그와 같은 때에 나는 도대체 누구입니까? ,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여! 당신의 손에 내 영혼의 모든 병을 고칠 수 없으십니까?”

결국 어거스틴은 바울처럼 죄성으로 인한 심각한 고민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는 구속의 은혜를 의지하며 십자가로 달려갔습니다. “나의 죄악들과 불행의 무거운 짐에 짓눌려 나는 공포 가운데서 빈들로 도망갈 생각을 했으나 그러나 당신은 그것을 금하셨습니다. ! 주님이시여 나의 모든 근심을 당신께 맡깁니다. 당신은 나의 무능과 약함을 아십니다. 나를 가르치고 나를 고치시옵소서. 당신의 독생자가 그의 피로 나를 구속하셨는데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 있사옵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속죄를 나의 마음에 꼭 붙잡으며 나의 음식과 음료인 그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십니다. 그를 먹는 자는 충족하게 될 것이고 그를 찾는 자는 그를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한 평생 하나님 나라와 아프리카 교회를 위해서 헌신 봉사하다가 4308월 열병으로 드러누웠습니다. 그는 자기의 마지막 시간을 조용히 있기를 원했습니다. 다윗의 참회의 시편 네편을 써서 자기가 앓아 누워있는 방 벽에 붙여 놓게 했습니다. 그 시편들은 시편 6편과 32편과 38편과 51편이었을 것입니다. 마지막 십 일 동안 날마다 그 참회의 시편들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깊이 통회하며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히포의 모든 교회들과 특히 평화의 성당에 모여든 신자들이 그를 위한 사랑과 슬픔의 기도를 드리는 가운데 어거스틴은 430828일 참회의 기도를 드리다가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그렇게도 사모하던 천국으로 옮겨졌고 그가 그렇게도 추구하던 의에 도달한 것이었습니다. 어거스틴의 시신은 그가 세상을 떠난 그날 히포에 소박하게 매장되었습니다. 어거스틴은 정말로 처절한 회개와 참회의 사람이었습니다.

 

4. 길선주

넷째로 한국교회의 아버지 길선주 목사님도 철저한 회개와 참회의 고백을 하시므로 한국교회를 탄생시키셨습니다.

19071월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사경회가 열렸는데 그 당시의 상항을 묘사하는 글들을 소개합니다. “2천명 이상을 수용하는 장대현 예배당에 회중이 차고 넘치도록 모인 사경회원 전체가 성령의 휩쓸린바 되어 혹은 소리쳐 울고 혹은 가슴쳐 통곡하며 혹은 흐느껴 울면서 기도하고 혹은 발을 구르고 자복하며 혹은 춤을 추면서 찬미하니 소리소리 합하여 소리의 기둥은 번제단에 타오르는 불기둥 같이 하늘로 떠 떠올랐다.”

길선주 장로는 이상한 귀빈과 괴이한 주인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했다.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이 이상한 귀빈이라는 것이었다. 존귀하신 분이 비천하고 누추한 땅에 오셨으니 이상한 귀빈이고, 귀중한 몸인데도 오셔서 밖에서 오래 기다리시니 이상한 귀빈이며, 전능하신 분이 간절히 두드리시니 이상한 귀빈이라는 것이었다. 귀빈을 맞아드리지 않으니 괴이한 주인이라는 것이었다. 자애하신 귀빈을 환영치 않으니 괴이한 주인이고, 간절하신 음성을 듣지 않으니 괴이한 주인이며, 굳게 닫은 방문을 열지 않으니 괴이한 주인이라는 것이었다. 길 장로는 문을 열라 문을 열라 문을 열고 환영하라고 준엄하게 외쳤다. 길선주 장로의 마음의 문을 열고 성령을 영접하라는 열띤 설교가 시작되었다. 설교가 끝나고 길 장로의 기도가 시작되자 감동을 받은 회중은 자기들도 모르게 아이고 아이고소리를 지르며 통회 자복했다. 장내는 금새 울음바다가 되었다.”

그는 기도회 도중에 갑자기 일어나 큰 소리로 외치기를 나는 아간과 같은 죄인이올시다라고 하면서 지난 날의 죄를 뉘우치면서 회개했다. 길 장로는 기도하기를 나는 하나님을 속였고 그 친구와 그의 부인을 속인 도둑놈입니다. 내일 아침 일찍이 그 돈을 부인에게 돌려주겠습니다라고 공중 앞에서 눈물과 함께 자복하였다. ‘나 때문에 온 회중이 은혜를 받지 못하고 있으니 나는 죄인 중의 죄인이올시다라는 자복기도는 쉬지 않고 계속하였다. 회중은 이 때 모두 마루 바닥을 치면서 회개하기를 시작하였다.”

이것이 한국교회가 태어나게 된 사건이었는데 그 사건은 진솔하고 처절한 회개와 참회의 사건이었습니다. 한국교회는 처절한 회개와 참회를 하는 가운데서 탄생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할 것은 진정한 회개와 참회의 역사는 성령의 역사로만 일어나고 회개와 참회의 사람에 의해서만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5. 이기풍

다섯째로 제주도 복음화의 선구자 이기풍 목사님도 회개와 참회의 고백을 평생토록 계속하신 분이셨습니다.

이기풍 목사님의 딸 이사례 권사님은 아버지의 삶과 죽음을 회고하면서 아버지 이기풍 목사님은 솔로몬의 영광보다는 욥의 고난과 인내를 사모하시던 분이시라고 간증을 했는데 그 간증의 일부를 소개합니다.

나는 제주도에서 지나던 어린 시절에 현재 제주도 성내교회의 목사관에서 자라났습니다. 이때에 잊혀지지 않는 사건이 평생 제 머리에 남아있습니다. 유치원 시절에 아버지가 새벽기도회에 가셔서 식사 때가 넘어도 돌아오지 않을 때 아버지를 모시러 심부름을 가끔 다녔습니다. 하루는 교회 문을 살그머니 열고 들어서는 순간 아버지의 큰 음성이 들렸습니다. 강대상을 부여잡으신 채 나는 죄인 중의 괴수외다라고 큰 소리로 울면서 기도를 드리고 계셨습니다.

나는 문간 옆에 있는 신장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아버지가 울고 계시니 나도 덩달아 눈물이 나서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던 일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는 평생을, 순교하시는 날까지 나는 죄인 중의 괴수라는 겸허한 자세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죽도록 충성하셨습니다. 제주도를 방문할 때마다 성내교회에 유물로 남아있는 강대상을 볼 때 아버지의 눈물 어린 기도소리가 들리는 듯 합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님들은 밖으로 나타나는 대단한 사역을 하기에 앞서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지극히 낮추는 처절한 회개와 참회의 삶을 살았던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6. 이성봉

여섯째로 한국의 무디 라고 불리시던 이성봉 목사님도 회개와 참회의 고백을 평생 계속하면서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신 분이셨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의 신앙과 설교는 회개를 통한 중생의 은혜를 강조하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새벽기도회의 시간은 추상같은 권위로 죄를 책망하는 시간이었으며 수많은 사람들은 죄를 자복하며 회개했습니다. 자신의 삶이 철저한 회개에 기초한 삶이었기 때문에 이성봉 목사님은 항상 죄를 무섭게 지적하며 회개할 것을 강하게 촉구했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에게는 대중들을 아부하는 설교는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항상 철저한 회개를 강조했습니다. 목사님 자신이 오직 하나님 앞에서 성결하게 살려는 뜨거운 소원을 가지고 평생토록 스스로 크고 작은 일들을 회개하면서 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은 설교 때마다 회개를 통해서만 죄인이 중생하고 구원 얻어 천국 간다고 강조했습니다.

죄 지은 사람이 지옥 가는 것이 아니요, 회개하지 못한 사람이 지옥에 간다. 개인이나 국가나 사회가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나님께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 기뻐하신다. 회개는 방향 전환이다. 회개는 또한 숨은 부끄러움 곧 속에 있는 더러운 것을 다 들추어내는 것이니 법률상으로 지은 죄, 도덕상으로 지은 죄를 다 하나님 앞에 고백하며 사람과 관련된 것은 또한 사람과 해결 지어야 한다.”

이성봉 목사님은 회개하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회개는 주님의 명령이요 소원인데, 회개란 지,,,행의 전폭적인 변화라고 폭 넓게 설명했습니다.

회개는 주님의 지상 명령이요 주님의 소원이며 뜻이다. 회개는 구원의 입문이요 기초이니, 복음의 대지가 회개요, 저주와 멸망을 막는 요새가 되는 것이다. 죄 지은 사람이 지옥 가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는 사람이 지옥에 간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회개할 것인가? 그것은 지. . . 행으로 나타낼 수 있다. 회개는 지적으로 죄를 깨닫는 것이다. 회개는 정적으로 슬퍼하는 것이다. 회개는 의지적으로 죄를 고백하는 것이다. 회개는 행위적으로 열매를 맺어야 할 것이다. 그런고로 철두철미하게 회개하라.”

하나님께서 부족한 저에게 베푸신 크신 은혜 중의 하나는 제가 중학생 때 대구에 있었는데 3년 동안 이성봉 목사님께서 인도하시는 부흥회에 거의 빠지지 않고 참석해서 깊은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특히 회개와 참회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7. 김치선

일곱째로 한국의 예레미아라고 불리시던 김치선 목사님도 회개와 참회의 고백을 평생 계속하면서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신 분이셨습니다.

제가 고등학생 때와 대학생 때 김치선 목사님께서 목회하시던 창동교회에 다녔는데 김치선 목사님께서는 새벽기도회 때마다 눈물을 흘리며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시곤 하셨는데 그 때도 저는 회개와 참회의 은혜를 받곤 했습니다. 김치선 목사님께서는 새벽기도회때마다 다음과 같은 찬송을 부르시면서 우시곤 하셨습니다. “성령이여 강림하사 나를 감화하시고 애통하며 회개할 맘 충만하게 합소서”.

그래서 저는 새벽기도회후 남산에 올라가서 20여 분 이상 더 기도하고 집으로 내려오곤 했습니다. 저는 또한 김치선 목사님께서 인도하시는 산 기도회는 어디든지 참석하면서 은혜를 받곤 했는데 삼각산 관악선은 물로 대구 주남산 기도회까지 참석하면서 은혜를 받곤 했습니다. 사실 저는 중학생 때와 고등학생 때와 대학생 때 이성봉 목사님과 김치선 목사님께서 전해주신 회개와 참회의 메시지와 은혜 사모의 메시지는 오늘의 저를 만드는 거름과 씨앗과 자양분이 되었다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얼마나 고맙고 감사하고 축복된 일인지 모릅니다.

 

8. 결론

이제 회개를 가장 귀중하게 여기신 신앙의 선배님들을 기리며라는 제목의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회개하면서 그리고 참회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야 하겠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회개하면서 사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첫째 색깔은 회개와 참회이기 때문입니다.

회개가 없는 믿음은 형식적인 믿음이고 위선적인 믿음이고 거짓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제사는 상하고 통회하는 회개의 제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상하고 통회하는 사람과 함께 하시고 상하고 통회하는 사람의 영을 소성시키시고 구원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51:17).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34:18). “지존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57:15).

다윗과 사도 바울을 비롯한 우리 믿음의 선배님들은 모두 철저한 회개와 참회의 제사를 드리면서 살았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부족한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시고 날마다 회개와 참회의 제사를 드리면서 살아가게 하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원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과 역사로만 진정한 회개와 참회의 기도와 제사를 드릴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길선주 목사님께서 집회 때마다 부르시던 김치선 목사님께서 새벽기도회 때마다 부르시던 찬송가 177(190) “성령이여 강림하사 나를 감회하시고를 우리들도 다 함께 부르시겠습니다.

김명혁 목사 / 강변교회 원로. 한국복음주의협의회 명예회장

(2023319. 수원 옥토교회에서 설교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