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남(2)
요한복음 3장 5-8절
서론
여러분 생각에는 종교생활에서 남성들이 잘 믿을 것 같습니까, 여성들이 잘 믿을 것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신앙과 신념은 쌍둥이처럼 보이기에 대체적으로 남자들은 신념에 살고 여성들은 사랑에 강하잖아요? 그러면 신념이 강한 남성들 신앙이 더 좋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기독교 역사를 보거나 어느 교회이건 여성들이 절대다수입니다! 여성들의 종교성이 강하기도 하겠지만 여성들은 본질적으로 거듭남을 잘 이해하면서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지난 시간에 거듭남(重生)에 대해 논했습니다. ‘거듭남’은 술꾼으로 세월을 낭비하던 김유신이 어머니의 꾸지람을 듣고 술집출입을 딱 끊었습니다. 어느 날 말위에서 잠을 자다 깨어보니 술집 앞입니다. 말은 습관으로 으레 술집으로 인도한 것입니다. 이에 김유신이 그 자리에서 말을 베어버리고… 정신을 무장해서 김춘추를 도와 삼국을 통일했다는 위인전류의 이야기… 여기에서 개과천선이 거듭남이 아닙니다.
거듭남은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속에 이식(移植)됨을 뜻합니다. 초대교회 교인들, 로마 박해 치하의 카타콤 성도들,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복음을 증거하는 선교사들, 한국교회 초대교인들… 그들은 생명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생명을 왜 아까워하지 않았을까요? 두 개가 있어서? 그렇지요! 그들에게는 생명이 두 개입니다.
생명이 두 개다! 남자들은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거듭남도 제대로 자각하지 못할 뿐 아니라 거듭난 생명이 성장이 더딥니다. 임신과 출산의 과정을 거쳤던 여성들은 두 개의 생명을 잘 이해합니다. 내 생명과 아기의 생명! 아기의 생명이 이식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생명이 자라면서 모성애가 생기고… 생명력에 대한 이해력이 많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아기에 대한 기쁨은 아기를 생기게 한 남편에 대한 또 다른 믿음과 이해심이 생기게 됩니다.
거듭남의 시기
하나님께서 거듭남을 일으킬 때는 대부분이 자각하지 못합니다. 구원파(기독교복음침례회, 예수교복음침례회를 일컫는 말)는 중생한 날과 시간을 알아야 하며 그 날과 시(時)를 알지 못하면 중생하지 못했다며 믿음이 약한 교인들을 미혹합니다. 내 생일을 알지 못하는 이가 어디 있냐며 중생의 날을 알고 있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아기들이 자기 출생을 자각하는가요? 부모가 알려주고, 기록해 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중생도 자각이 없는 게 정상입니다.
8절,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헬라어, 히브리어에서 ‘바람’과 ‘성령’은 같은 어원입니다. 바람이 눈에 보이지 않게 지나가듯 성령의 역사도 대부분 자신이 모를 사이에 일어납니다. 바울처럼 자각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거듭났지만 체험할 수 없는 것은 스스로 거듭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엄마가 아이를 낳을 때 나올 때 협력합니까? 순전히 엄마의 힘으로 나옵니다. 거듭남도 거듭나게 하시는 분은 내가 아니라 ‘성령’입니다. 그러니 대부분의 당사자들은 모릅니다.
세계어린이전도협회의 통계에 의하면, 그리스도인들 중 86%가 15세 이전에 거듭났으며, 10%가 15~30세 사이에 거듭났고, 30세 이후에 거듭 난 사람은 4%에 불과합니다. 미국의 종교심리학자 보너 박사는, 전혀 기독교와 관계없이 살다가 개종한 의사, 변호사, 교수, 박사, 기업인 사장 등 전문직 종사자 253명에게 언제 예수 믿게 되었느냐?는 질문을 하고 통계를 내보입니다. 20세 이전 138명(55%), 21세~30세 65명(26%), 31세~40세 22명(9%), 41세~50세 4명(2%), 51세~60세 3명(1%), 61세 이상 1명(0.4%)이었습니다.
종교심리학자 스펜서 박사는 1,000명의 기독교인들이 언제 구원받았는가? 라는 질문에 20세 이전 548명(54.8%), 21세~30세 337명(33.7%), 31세~40세 96명(9.6%), 41세~50세 15명(1.5%), 51세 이후 4명(0.4%)이라는 응답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초대교회 서머나교회 감독 폴리캅과 찬송 작시자 이삭 와츠는 9세 때 거듭남을 체험했고, 미국의 부흥사 요나단 에드워즈는 7세, 헨리 워드 비처는 5세에 구원을 체험했습니다. 17세기 청교도 지도자 ‘참 목자상’의 저자인 리처드 백스터는 6세, 유명한 화가 밀레는 어린 시절 바다 위에서 해가 지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인상을 받았다 고백했습니다. 빌리그레함은 자신의 아내와 딸이 4세에 구원을 체험했고 처남 레이튼 포드 복음 전도자는 6세 때에 구원받았다고 간증했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생각하는 이상으로 일찍 거듭남을 체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거듭남은 신자 개인의 노력으로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자녀들에게 늘 거듭났는가? 물어야 하고 자녀가 그에 대한 열망이 있을 때 성령께서 역사해 주실 것입니다.
거듭남은 1회적인 현상입니다. 한 번 거듭났으면 단 한 번으로 하나님의 생명이 내 속에 이식된 것입니다. 다른 생명과 장기는 한두 번 더 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거듭남의 생명은 한 번으로 영원합니다. 거듭남을 원하는 사람, 손 드세요! 할 때마다 일어서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대부분 거듭났음에도 불구하고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처럼 행세하거나 거듭남의 결과들이 보이지 않는 것은 내가 거듭남에 대한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강권적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지만 다음부터는 강요하지 않습니다. 다음부터는 우리가 구원에 관심을 갖고 거듭난 삶에 관심을 갖고 노력하고 구하고 열망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니까 한국교회에 공회전 믿음이 엄청나게 퍼져있는 것입니다. 오래 믿어도 그 자리, 오래 다녀도 그 자리, 오래 기도해고 그 자리… 공회전 현상이 심각하다보니 시험 들고 본을 보이지 못하고… 주님께서 이미 말씀하신 바입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그러기에[ 믿음의 출발에서 가장 기초! 거듭남의 성벽을 든든히 세워야 합니다!
거듭남의 수단(방편)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방편이 없어도 사람을 중생 시키십니다. 중증(重症) 정신박약자들이나 출생하자마자 죽은 아이들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중생시킵니다. 그들은 하늘나라에 가서야 하나님의 완전한 지혜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의 권능으로 자신들을 중생시키고 천국으로 불러 오셨음을 알고 감격하며 찬양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아기 때 죽은 영혼이나 정신박약아 영혼이나 최고 최상의 수준과 지식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과 구원을 감격합니다. 세상에서 자기들이 쓰고 살아왔던 ‘껍데기의 육신’ 정박아들이었기에 도무지 구원받을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 똑똑한 사람들은 구원을 놓쳤는데, 내가 중생하고 구원을 받다니, 얼마나 감사와 감격이 터지겠습니까? 천국은 날마다 감격이 터지는 곳입니다. 정신박약자들이, 어린아이들이 천국으로 들어올 때마다 하나님의 능력과 공평하심을 확인하여 우렁찬 찬양의 소리가 울려 나오는 곳이 천국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자신의 단독 역사로 구원시킬 수 있지만 사람들을 중생시킬 때 또 다른 방편을 사용하십니다. 말씀과 성령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령이 그 속에서 감동시키며, 수용케 하실 때에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은총을 인정하게 됩니다.
이때 거듭남(중생)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러면 말씀을 듣다가 깨달아지는 것이 있습니다. 나는 죄인이라는 것, 예수가 나의 구세주라는 것, 천국이 있다는 것, 하나님께서 나의 아버지가 되심이 믿어지면 그 사람은 틀림없이 거듭났습니다. 이런 믿음은 거듭남이 없으면, 하나님께서 주신 새로운 속사람의 지식이 아니면 알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습니다. 믿어지면 그것은 자연적인 내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내 속에 있다는 것은 내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이식되었다는 것이고 내가 거듭났다는 것입니다.
거듭나지 않으면 말씀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육(肉)으로 난 것은 육이요, 육의 귀로 들으니 안 믿어집니다. 영(靈)의 귀로 듣고 영의 마음으로 받아야 하는데 거듭나지 않으면 영의 귀도 없고 영의 마음도 없습니다. 그러니 육으로 난 것은 육일뿐입니다. 믿어진다는 것은 거듭났다는 증거입니다. 믿어짐의 큰 은총을 감사해야 합니다.
거듭남의 영역
중생의 결과는 불순종으로 부패해져버린 인간의 전 인격을 회복시킵니다.
㉠ 지식
일반 종교적인 지식에서 이해하던 ‘하늘님’이 거듭나게 되면 지식에 변화를 일으켜서 성경에 게시된 내용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며 믿게 됩니다(고전 2:14, 15 참조). 거듭나면 유치부 아이들도 하나님을 알게 되지만 거듭나지 못하면 신학박사들도 하나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거듭남은 그렇게 중요합니다.
㉡ 감정
육신의 본성과 욕심을 좇아가던 자리에서 그것을 절제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분을 사모하므로 죄를 멀리하게 됩니다. 그만큼 성결 되어 갑니다(갈 5:24, 요일 2:16).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열망과 예수님을 사모하며 그리워하는 정서로 바뀌게 됩니다.
㉢ 의지
중생한 의지는 악에서 돌아서게 하는 신앙적 의지로 바뀝니다. 악에서 떠나는 의지가 견고해지고, 점점 깊은 단계로 들어서면서 성품의 변화-성령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처럼 성령의 거듭나게 하시는 영역은 전 인격입니다.
워터게이트 스캔들(1972년 6월 대통령 R.M.닉슨의 재선을 획책하는 비밀공작반이 워싱턴의 워터게이트빌딩에 있는 민주당 전국위원회 본부에 침입하여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다 발각·체포된 미국의 정치적 사건)의 중심에 있던 찰스 콜슨은 감옥에서 회심을 했습니다. 그는 감옥에서의 회심을 바탕으로 ‘다시 난다’(Born again)는 책을 섰습니다. 그는 출옥한 이후에도 교도소 선교를 했습니다. 지금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진정한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이처럼 거듭나면 믿음이 달라집니다. 그전에는 형식적이고 관념적입니다. 교회에 나오는 것도 종교적인 습관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중생하고 나면 믿음이 새로워지고, 확신이 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세주임을 확신케 됩니다. 그렇다고 신앙이 모두 펄펄 뛰는 것은 아닙니다. 달라진 모습을 보여 주지는 못하고, 중생 자체를 자각하지 못한 상태로 오래도록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중생-새 생명의 씨앗이 떨어졌기에 언젠가는 밖으로 변화된 행동의 열매들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 날을 기대하시기를 바랍니다.
중생한 자들은 죄와는 아주 멀어진 상태가 될까요? 죄를 아주 끊어버리는가요? 여기에 대한 답은 두 가지입니다. 성령훼방죄, 예수를 부인(否認)하는 결정적인 죄는 짓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생활의 죄는 범할 수 있습니다. 많이 짓던 죄에서 작게 짓는 죄로, 죄를 은근히 즐기던 자리에서 죄 지을 때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부끄러워하는… 이런 단계로 조금씩 향상되게 됩니다. 이런 단계가 바로 성화(聖化)입니다.
결론
니고데모는 거듭났을까요? 니고데모는 분명 거듭난 행동을 보이고 있습니다. 처음 찾아왔을 때는 밤중에 몰래 방문했습니다. 사람들 눈에 띄어 공연히 한 패거리로 오해를 받을까봐 은밀히 행동한 것입니다. 그것은 거듭나지 못한 행동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던 날에 아리마대 요셉과 함께 예수님의 장사의식을 지낸 이는 니고데모입니다(요19:39). 처음 만남부터 이때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렸을까요? 그 안에 계속적인 만남이 있었을까요? 어떻든 니고데모는 더 이상 숨어서 믿음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는 은닉된 그리스도인도 아니고 익명의 그리스도인도 아닙니다. 자기의 이름과 신분을 드러내고 새로 가진 믿음을 드러낸 신자가 되었습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증표를 보인 것입니다. 두 개의 생명을 가진 거듭난 그리스도인들만이 보여주는 믿음의 배짱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거듭남의 열매들이 많이 나타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나실인으로 살기
사사기 13:1~25
다시 악을 행하였으므로
사사기는 여호와가 죽은 후부터 왕정이 수립되기까지 이스라엘의 생활상을 묘사한 책이다. 이 책은 여호수아 사후 이스라엘이 걸어갔던 타락의 길과 사사(士師)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즉, 이스라엘의 계속되는 배교와 그 결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징벌, 그러한 곤경 중에 부르짖는 이스라엘에게 구원자를 보내서 압제자를 무찌르고 평화를 되찾게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묘사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는 도구로 사사(士師)들을 사용하신다. 사사는 `최고 지도자들', 즉 판결하는 판관이다. 사사들은 여호수아 사후부터 왕정 수립 이전까지의 기간에 활약했던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다.
삼손은 사사기에 기록된 마지막 사사이다. 삼손의 이야기는 40년간의 블레셋 압제 기간 중의 초기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삼손은 팔레스틴 해변이 계속 크게 침범 당하던 시기에 살았다. 이스라엘은 학대를 당할 때마다 죄를 뉘우쳤고 구원자를 기대했다. 삼손이 출생하기 직전, 하나님은 바락과 기드온을 보내서 구원해 주었지만 이스라엘은 연례행사처럼 하나님을 배역했다.
하나님은 블레셋의 학정으로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이스라엘 백성은 다시 하나님께 돌아섰고 구원자를 갈망했다. 이스라엘의 회개를 인정하시고 보내주신 구원자가 바로 삼손이다.
삼손처럼 좋은 전조를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도 드물다. 세례 요한처럼 그의 출생은 하나님으로부터 예고되었다(사사기 13:3~5). 그는 경건한 부모 밑에서 태어나는 축복을 받았다(13:8). 그의 결혼 잔치에 많은 친구들이 참석한 것으로 보아(14:10, 11) 어느 정도의 재산과 영향력을 갖고 있던 유력한 가정이었다.
그가 출생한 곳은 가나안 서남쪽 소라라는 작은 성읍이었다. 소라 성읍은 예루살렘 서쪽 22.5km 지점에 위치해 있다. 소라는 실제 유다 지파에게 분배된 성읍이었으나(여호수아 15:33) 후에 단 지파에게 돌려졌다(여호수아 19:41). 단 지파는 이곳에서 출발하였지만 블레셋의 압제에 못 이겨 북쪽으로 이주하였다(사사기 18:2, 8, 11).
그곳에 마노아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마노아라는 이름은 ‘쉬다’, ‘안식하다’의 뜻으로 ‘노아’에서 유래되었다. 이름처럼 그들 부부는 경건한 사람이었으나 자녀가 없었다. 이는 그들에게는 큰 슬픔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은 틀림없이 자녀를 위해서 기도했을 것이다. 마노아는 경건한 사람이었기에 불의한 방법으로 자녀를 얻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녀를 주실 때까지 기다렸다. 자기 소견을 좇아 살아가던 시대에 여호와의 뜻을 기다리며 산다는 것은 가볍게 넘어갈 일이 아니다.
나실인의 규범
어느 날 마노아의 아내가 여호와의 사자의 방문을 받았다. 천사의 방문은 그녀의 마음을 거룩한 경외심으로 가득 차게 했다. 그녀는 남편에게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의 사람이 내게 임하였는데 그 용모가 하나님의 사자의 용모와 같아서 심히 두려움으로 어디서부터 온 것을 내가 묻지 못하였고 그도 자기 이름을 내게 이르지 아니하였으며”(6절).
마노아의 아내는 여호와의 사자의 용모를 알아보는 안목이 있었다. 그 사실은 평소 그녀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생애를 살아왔음을 뜻한다. 마노아 역시 경건한 사람이었다. 아내의 말에 대한 마노아의 반응은 그의 성품의 됨됨이를 보여준다. 그는 아내의 말을 듣자마자 기도하였다(8절). 이는 그가 경건의 사람이라는 표시였다.
마노아와 아내는 자식의 출생 예고를 받았을 때 먼저 하나님의 목적을 생각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부모로서의 소원 성취, 만족감, 가문의 영광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구원을 먼저 생각했다. 지금 이스라엘은 블레셋의 압제 하에서 고통 받고 있었다. 마노아는 하나님의 구원이 자식을 통해 이루어지기를 은근히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마노아의 응답은 하나님의 마음을 매우 흡족하게 하였다. 하나님은 1,2차 방문을 통해 두 가지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치운 나실인이 됨이라”(5절).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5절).
첫 번째의 말은, 삼손의 힘의 근원을, 두 번째 말은 사역의 범위를 나타낸다. 아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사사의 역할을 감당하게 될 것이라는 예시가 주어졌다. 그래서 마노아는“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오며 우리가 그에게 어떻게 하오리이까”(12절)라고 물었던 것이다.
여호와의 사자는 나실인의 규범을 전해주었다. 나실인은 ‘성별된 자 바쳐진 자’라는 뜻으로(민수기 6:1~21) 평생 동안 유효한 나실인이 있고 일정한 기간 동안에만 지키는 나실인이 있다.
나실인은 세 가지를 준수해야 한다.
첫째는, 포도주와 독주 금지였다(4절, 민수기 6:3). 포도나무의‘소산’은 포도즙, 생포도, 건포도, 포도씨, 포도껍질까지 포함한다. 이것은 감각적인 쾌락으로부터 자신을 절제하며 보호하라는 것이다. 하나님께 헌신하려는 자들은 항상 자신을 절제하며 거룩한 영에 취하는 일 외에는 함부로 쾌락을 좇아가서는 안 된다.
둘째는,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는 것이다(5절). 그것은 구별이었다. 머리를 깍은 사람들 사이에서 머리를 깍지 않은 사람들은 쉽게 구별되었다. 그들은 자연히 성별된 구별의 행동을 보이게 될 것이다. 특히 삼손의 경우는 그 힘의 원천이 위에 계신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며 사는 표시로 삭도를 대서는 안 되었다.
셋째는, 죽은 자로부터 삼가는 것이었다(민수기 6:7). 그 부모 형제가 죽을 때에는 그 시신에 손을 대서는 안 되었다. 시체는 죽음이었다. 그것은 하나님과 반대이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생명 자체이이다. 나실인은 하나님의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 바쳐진 자이기에 생명이요, 죽음과는 별개의 존재가 된 자였다. 그런 의미에서 죽은 자를 만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삼손의 부모는 나실인의 부모로서의 임무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삼손은 부모의 맹세를 자신의 것으로 알고 잘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 맹세를 받아들이는 것과 맹세에 충실한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삼손은 맹세에는 충실하지 못했다. 이것이 그의 결정적인 실수였다.
삼손-작은 태양
마노아 부부는 아들을 낳아 이름을 ‘삼손’이라 하였다. 삼손이라는 이름은 ‘작은 태양’, ‘광채’를 뜻한다. 부모들은 아들이 이스라엘 역사에 작은 태양으로 쓰임 받을 것을 확신하였다. 그들은 삼손이 출생되기 직전 여호와의 사자의 방문을 받았고 그 방문에서 두 가지 암시를 받았다.
첫째는, ‘기묘’자를 만난 것이다. 여호와의 사자에게 마노아는 이름을 물었다. 여호와의 사자는 “내 이름은 기묘니라”(18절)고 하였다. 기묘라는 말은 ‘절대적이고 탁월하게 기이하신 이’ 라는 뜻이다. 이 말은 하나님에게만 사용될 수 있는 용어이다.
기묘자의 나타나심에서 마노아는 벌써 아들의 운명을 읽었다. 하나님의 탁월하신 능력이 아들에게 임한 것이다. 그들은 아들이 큰 사사가 될 것이며 블레셋의 그늘에 살고 있는 동족들에게 광채가 될 것이다. 이것이 마노아 부부의 확신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아들의 이름을 삼손이라 명한 것이다.
삼손이라는 이름 속에는 아들의 능력의 근원이 여호와에게 있음을 나타내는 마노아의 경건함이 나타난다. 삼손은 큰 태양이 아니다. 아들은 작은 태양에 불과하다. 그가 광채 나는 태양이 되려면, 그가 계속 광채를 발하려면 빛을 공급받아야 한다. 그 빛은 하나님의 빛이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머물며 그에게 능력을 줄 때에만 비로소 아들은 계속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아들은 발광체가 아니라 반사체인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을 계속 공급받을 수 있는 길이 바로 나실인의 서약을 준수하며 사는 것이다.
삼손은 경건한 부모의 경건한 신앙 안에서 자라났다. 그는 나실인의 규범을 준수하며 자라났다. 하나님은 아이에게 복을 주시며 여호와의 임재를 체험하게 했다. 아이가 자라나면서 능력도 함께 자라났다. 이제 이스라엘에 구원자가 임했고 그는 쓰임 받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구원자 삼손,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상징한다. 삼손의 힘은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를 보여준다. 삼손은 혼자의 힘으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대적하였다. 마찬가지로 성자 예수님의 권능은 우주 곳곳에 충만하고 그분은 세상에 계시면서 그 힘을 유감없이 발휘하셨다. 성경독자들은 삼손의 능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힘을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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