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남(1)
요한복음 3장 1-5절
서론
종교를 크게 대별(大別)한다면 ‘상향종교’와 ‘하향종교’로 나뉩니다.
상향종교는 내가 신을 찾아가는 종교로, 불교는 내 안에 있는 신을 찾고 일반 종교들은 옆으로 위로 신을 찾아 갑니다.
하향종교는 신이 나를 찾아오는 종교입니다. 같은 뿌리를 가진 유대교와 기독교가 하향종교입니다. 죄인 아담이 용서해 달라, 제 발로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아담아 어디 있느냐?”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먼저 찾으셨고 예수님께서도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나를 따라 오너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인 신분인 우리를 찾아오셔서 부르십니다. 부르심은 구원의 첫 서정이라고 지난주일 말씀드렸습니다. (복습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세 차례입니다. 구원으로의 부르심, 사명으로의 부르심, 천국에서의 부르심입니다. 그 호출에 우리 생애가 땡! 종치고 천국 갑니다.
하나님께서 선택된 자들을 부르시고 “이제는 네가 알아서 구원 받고 천국으로 올라와라~” 하지 않습니다. 구원해 주기로 선택된 이들을 부르셨기에 이후의 과정도 하나님께서 책임 있게 진행하십니다. 구원으로 부르신 후에 하나님께서 하시는 다음 서정(순서)이 ‘거듭남’입니다. 거듭남은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시기에 상당히 중요합니다.
어느 날,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바리새인이면서 관리(산헤드린 회원-70인으로 구성된 유대 최고의 법정)였으며, 큰 부자였고(요17:39)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고 해석하는 랍비였습니다. 당시는 예수님과 유대 지도자들 사이에 대립 직후였기에(요 2:13~22) 바리새파 중의 유력자가 예수님을 찾아 왔다는 것은 뜻밖의 사건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가 메시아적 능력을 갖고 있는가를 탐색해 보고 싶었을 것입니다. 유월절에 행하신 이적을(요2:23) 목도하고 혼인 잔치 이적을 전해 들었을 거예요. 이 젊은 선지자가 로마 정부에 대해 어떤 소신을 지니고 있는가, 예수에게서 대안을 찾으려 했는지도 모릅니다. 이미 군중들의 ‘스타’로 부가된 이 청년을 잘 교육시키고, 같은 편이 되면 백성들을 선동시키고 생각대로 풀리면 유대 나라는 독립될 것이요, 이 땅에 도래할 지상 천국일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정치적이고, 물리적인 힘으로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할 수 있고, 메시아 역시 그런 능력의 소유자라 생각했기에 젊은 선지자의 본심을 떠 보려 은밀히 찾아온 것으로 보입니다.
거듭남의 요구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의 바람을 채워주기는커녕 지금 유대백성들이 취할 우선순위는 세상 나라가 아님을 분명히 하십니다. 이 땅에 정치적인 유대 왕국을 이루기 전에 너희가 먼저 천국 백성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뜬금없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거듭남’은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용어입니다. 품행 불량자에게나 하는 요구입니다. 다음 장, 3장에 나오는 수가성 여인은 남자들에게 버림을 받았던 자기가 남자들을 버렸던 일종의 ‘남자중독자’입니다. 그래서 늘 삶이 혼란스럽습니다. 차라리 이런 여인에게 ‘거듭나야 한다!’ 꾸짖거나 요구해야하는 것이 아닙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런 요구를 니고데모에게 합니다. 니고데모가 누구입니까? 유대사회에서 일종의 멤버십 카드를 갖고 있는 사회지도층입니다. 여기에 존경의 대명사 랍비입니다. 이런 인격자에게 거듭남을 요구한다면 유대 사회 모두에게 해당될 사람입니다. 그만큼 니고데모는 종교적으로나 인품 덕(德)으로나 거듭남과는 전혀 상관이 없을 인격자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거듭나라니요! 그는 거듭나기 위해 방문한 사람이 아닙니다. 애국적인 차원에서도 찾아왔지만 종교적인 구도(求道)에 목마른 사람입니다. 유대의 율법으로는 뭔가 채워지지 않았고 영적인 갈증으로 목이 마른 사람입니다. 이렇게 찾아온 사람에게는 생수에 관한 말씀을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는 서로 반대의 요청을 하십니다. 여자에게는 생수를 구하라 하시고 니고데모에게는 거듭나라 하십니다! 당연히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거듭난다는 단어는 쉽게 들을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처음 듣는 단어요 충격적인 요구였습니다.
거듭남이란?
예수님께서 요구하신 거듭남(중생)은 윤리적인 의미 이전입니다. 그보다 훨씬 더 영적이요 근원적입니다. 예수님의 거듭나라는 요청에 니고데모는 당연히 이해를 하지 못합니다.
4절,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거듭남, 중생에 대해 니고데모는 1차 2차의 2회 출생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2차가 아니라 하늘에서의 출생에 비중을 둡니다. 다시 ‘태어난다’는 ‘위에서 난다’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born again’ 다시 태어나야 한다! 어머니에게서 받은 생명은 육체생명입니다. 세상에서나 살 수 있고 유한합니다. 죄성으로 가득 차 있어 육신의 일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두 번 째의 출생은 ‘위’-하나님에게서 와야 합니다. 위에서 나야한다! 그 위는 하늘이요, 하나님이십니다. 아래는 땅이요, 인간입니다. 어머니로부터 받은 육신의 생명은 백년 미만입니다. 좋은 영양을 취하고, 장수비결을 좇아 몇 년 연장할 수는 있어도 2백년까지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머니께로부터 받은 한시적 생명으로 착하게 살고 수양과 도덕을 쌓았다하여 영생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머니에게로부터 받은 육신의 생명은 땅위에서나 소용이 있을 뿐, 죽으면 끝나는 것입니다. 이런 생명으로 영생하겠다는 생각은 착각일 뿐입니다.
사람이 영생하려면 영생하는 생명을 받아야 합니다. 영생하시는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내 안으로 이식되어야 하나님처럼 영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이식되는 것, 이것이 바로 중생이요, 거듭남입니다.
그러기에 요한은, 예수를 영접하고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 자녀가 되는 엄청난 은총을 누린다고 말합니다(요1:12). 그렇게 영접해서 얻는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13절. 고전 15:47)라고 합니다. 하나님으로 났다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을 얻은 자의 신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제대로 영접하면 곧장 생명이 이식되면서 생명은 두 개가 됩니다. 육체생명은 임대기간이 정해졌으며 영적생명은 영생입니다. 임신과 출산경험이 있는 여성도님은 거듭남교리를 이해하는 데 훨씬 유리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더 잘 믿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얼마 전에 자궁 없이 태어난 미국 여성이 아들 품에 안았습니다. 30대 여성 맬러리는 17살 때 생물학적 자녀를 가질 수 없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마이어 로키탄스키 쿠스터 하우저(MRKH) 증후군’으로 태어날 때부터 자궁과 질 등 생식기가 미숙하거나 아예 없는 질환입니다. 발생률은 여성 4,500명 중 1명꼴로 알려져 있습니다. 믿기 힘들기도 하고 끔찍한 통계입니다. 맬러리는 너무도 내 아기를 갖고 싶어 자궁이식수술 프로그램에 신청했고 18개월을 고생해서 아들을 품에 안았습니다. 이식된 자궁은 다시 적출해야 한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의학의 발전이며 과학이 주는 혜택입니까? 여인은 불행 중에 얼마나 큰 기적을 체험했겠습니까? 자라는 아들을 볼 때 날마다 생명의 환희를 느낄 것입니다..
우리는 이보다 더한 하늘의 생명을 이식한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날마다 놀라워야 하고 행복해야 합니다. 그만큼 거듭남은 내 생애에 일어난 최대의 축복입니다. 내가 영원한 생명을 이식 받았다니, 이처럼 엄청난 사건 개심(改心)정도로 축소시켜 버리면 안 됩니다.
두 개의 생명으로 산다!
거듭남, 중생이 새 생명-하나님의 영생의 생명이 우리들 속에 이식(移植)되는 일임을 안다면 당연히 예수만이 참 구세주이시며, 그리스도교만이 유일한 구원의 종교임을 주장함에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거듭남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생명을 얻는 일입니다. 바다 속에는 그 속에서 살 수 있는 생명이 있는 어류(魚類)만 살 수 있습니다. 사람이나 짐승이 아무런 장치 없이 물속에서 산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반대로, 물고기는 육지에서 살 수 없습니다. 육지에서 살 수 있는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환경, 그 세계에서 살아갈 수 있는 생명이 없으면 데려다 주어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 앞으로 달을 비롯해서 여러 행성들을 정복할 것입니다. 여러 행성은 인간이 살 수 없는 세계입니다. 인간이 살기 위해서는 그곳에 맞는 호흡 장치를 착용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런 것이 없이 무조건 달나라에 발을 내 딛었다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착하고 악하고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달에서 살 수 있는 생명이 있느냐, 없느냐 그것으로 달에서 살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습니다.
천국도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천국은 이상향(理想鄕)이고 누구나 가고 싶어 합니다. 천국 가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 대부분의 종교의 가르침입니다. 이 종교에서는 착하고 선해야…, 저 종교에서는 수도와 고행을 쌓아야… 등등 많은 방법을 전해줍니다. 니고데모를 비롯한 유대인들은 선민이면, 율법을 준수하고 할례를 받기만 하면 구원은 따 놓은 당상이라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런 관점을 일언지하로 묵살시켜 버립니다. 천국은 인간의 의와 노력이 아니라 천국에서 살 수 있는 생명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런 생명이 없으면 천국에 인도되어도 살수 없습니다. 그것은 물고기를 육지에, 짐승을 바닷물 속에 처박아 놓은 것입니다.
요즈음 한국 교회에 다원주의(多元主義)와 포스트모더니즘 신학들이 일어나 파문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앞으로 더욱 기승을 부릴 것입니다. 이 신학들의 골자는 한마디로 그리스도교 외에도 구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인들도 종교의 이름만 다르고 교주의 이름만 다를 뿐 그들은 그리스도인, 은닉된(익명의) 그리스도인들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듣기가 좋은 주장입니다.
그들의 주장 속에는 타종교에 대한 상당한 관대함과 종교적 포용이 있습니다. 일반 지식인들이 언론을 동원하여 그들을 지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사람의 행위나 의지(意志), 종교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속에 하나님의 나라, 영생하는 그 나라에 가서 살 수 있는 생명이 있으면 들어가는 것이고, 영생할 수 있는 생명이 없으면 도무지 그 나라에서 살 수 없습니다.
이런 단순한 영적 진리를 신학교의 교수, 신학박사라는 분들이 모르는 경우를 대하면, 땅속의 세계는 달관하고 있으면서도 천문학에 대해서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두더지들이 생각납니다.
니고데모는 역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예수님은 한 말씀하십니다.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요 3:11).
신학교 교수들, 신학박사들은 귀담아 들어야 할 것입니다.
거듭나게 하는 주체
하나님의 영생 생명이 이식되는 중생의 순간을 누가 주도할까요? 하나님? 인간? 아니면 하나님+인간의 협력? 중생이란 죄인(죽은 자)의 협력이 조금도 필요치 않은 오직 성령 하나님의 독자적인 역사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 살리실 때 아무런 도움도 받지 않았습니다. 나사로는 죽어있었기에 반응 할 수 없습니다. 살리신 분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 자신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한 쪽 강도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천국의 생명이 이식되는 순간입니다. 십자가 침상에 누워 계신 예수님의 피를 성령께서 한쪽 강도에게 발랐고 그 생명을 떼어 이식시켜 주었습니다. 성령은 이식(移植) 전문의사인 셈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은 영생하는 생명입니다. 그래서 강도가 영생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다른 한 쪽 강도는 자기 죄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천국에서 영생할 생명을 이식받지 못했기에 들어가지 못한 것입니다. 그만큼 믿음이 만들어 내는 능력은 천국에 가느냐, 못 가느냐…를 판가름합니다.
성령이 일방적으로 거듭나는 역사를 일으키기에 특별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나의 거듭남의 시간을 확실하게 체험하지 못합니다. 뜨거운 체험 없이 내 마음에 새생명을 이식해 줍니다. 그 사실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8절,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헬라어, 히브리어에서 ‘바람’과 ‘성령’은 같은 어원입니다. 바람이 눈에 보이지 않게 지나가듯 성령의 역사도 대부분 자신이 모를 사이에 일어납니다. 바울처럼 자각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거듭났지만 체험할 수 없는 것은 스스로 거듭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엄마가 아이를 낳을 때 나올 때 협력합니까? 순전히 엄마의 힘으로 나옵니다. 거듭남도 거듭나게 하시는 분은 내가 아니라 ‘성령’입니다.
5, 6, 8절 “성령으로…”
거듭남은 성령의 단독사역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은, 하나님께서 선택해 놓으신 명단을 보면서 하나님의 생명을 그에게 이식시키는 심장이식 전문의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아동들, 정신박약아들도 거듭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천국에서는 삼위일체하나님만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나라인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갖출 수 없다는 것이 구원론의 기본교리입니다.
천국은 누가 갑니까? 착한 사람들이 가는 곳이 아닙니다. 착한 사람들이 가도 못 삽니다. 거기에는 천국에 생명을 지닌 하나님의 자녀들만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물고기는 물 속에 사는 생명이 있습니다. 동물은 지상에 사는 생명이 있습니다. 서로가 다른 세계에서는 못 삽니다.
천국은 천국의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들-하나님의 생명을 이식받은 사람들만 살 수 있습니다. 착하고 위대해도 이런 생명이 없으면 주어도 못 삽니다. 그래서 거듭남이 필요합니다. 거듭난 여러분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의 한 형제자매인 것입니다.
결론
우리 장로교는 선택과 예정에 강조점을 두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굳건한데 뜨거움과 체험적인 신앙이 좀 약합니다. 침례교 목사님들은 거듭남을 강조합니다! 언제 거듭났습니까?
거듭남에 대한 확신이 있고 질문이 있어야 믿음에 체험이 들어서면서 믿음이 움직이고 성장합니다. 우리는 거듭남에 관한 진한 관심과 물음이 없기에 성장이 더디고 오랜 세월을 공회전 믿음으로 세월을 보냅니다.
이제 거듭남의 체험과 관심으로 믿음을 출발합시다! 내 안에 새 생명이 있음을 확신하고 자부심으로 살아갑시다! 그래야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풍성한 삶을 보여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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