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론
장로교는 무엇인가? 에 대한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장로교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칼빈주의 5대교리-인간의 전적 부패, 무조건적 선택, 제한적 속죄… 등을 설교했습니다.
오늘은 네 번째 교리-“불가항력적 은혜”입니다. 이 교리 역시 앞의 교리들처럼 장로교 교인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이 없으면 도무지 구원받을 수 없음을 깨우치고 하나님 찬양, 감사하는 높은 경지의 신앙인을 만들어 줍니다.
1. 불가항력적 은혜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상태는 전적 부패(원죄)입니다. 인간에게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실만한 선(善)이 없고 선함을 통해 구원에 이를 가능성은 단 1%도 없다는 교리입니다. 연탄을 아무리 수건으로 닦아도 연탄색입니다. 흑인은 온갖 좋은 것으로 닦아내어도 검은 피부입니다. 에이지 걸린 여인에게서는 에이즈 걸린 아이가 태어납니다. 인간의 부패가 그렇습니다!
탈무드에 “쓴 열매 맺는 나무를 떠다 에덴동산에 옮겨 심고 에덴동산의 물을 주고 가브리엘 천사로 그 나무를 돌보게 해보라. 그래도 그 나무는 여전히 쓴 열매를 맺힐 것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타락한 상태로 태어나는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는 자력(自力)으로 의인되고 구원 얻을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런 교리가 별로 마음에 안 들었지만 인간의 전적 타락을 믿으니까 인간이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목회는 인간 이해-이게 안 되면 매일이 스트레스입니다. 전적 부패-사람은 별 사람이 없다, 이 사실을 이해하니 교인들이 이해되기 시작하고 긍휼 목회가 되었습니다.
이런 부패한 상태의 인간 중에서 하나님께서 일부를 선택하십니다. 선택의 조건은 무조건입니다. 굳이 조건을 달자면 ‘하나님의 선택’이 조건입니다. 누구를 구원해 주기로 선택할 것인가? 은혜 베풀기로 선택할 것인가? 에베소에서 바울은 “그 기쁘신 뜻대로”(엡1:5)라고 합니다. 하나님 마음대로 선택하신다는 것입니다. 인간 편에서의 조건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택된 자들을 위해 독생자를 보내셨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대속적인 죽음입니다. 이 죽으심의 효력은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인 것으로 믿는 게 감리교회이고 선택받은 사람들에게만 제한적으로 임한다는 것이 장로교입니다.
아울러 개인들에게 적용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일방적 은혜가 임할 때 인간은 거역할 수 있다, 는 것이 성결교, 감리교이고, 인간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실 때에 저항할 수도, 거역할 수도 없다는 것이 장로교의 네 번째 교리인 “불가항력적 은혜”입니다. 따라해 봅시다! 불가항력적 은혜!
바울은 기독교의 최대 대적자였습니다. 교인을 체포해서 고문하고 처형하는 유대교 광신자였습니다. 이런 사람이 교인들을 체포하러 가다 다메섹언덕에서 부활의 주님을 보고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눈부신 빛 앞에서 바울은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앞에 그의 삶이 순간적으로 뒤죽박죽이 되어버렸습니다. 부인하려고 했지만 부인할 수 없고 어떻게 저항해 볼 수 없을 만큼 격렬한 저기압성 폭풍인 토네이도(tornado)처럼 바울을 덮쳤습니다. 저항도, 이성적으로 처리할 수도 없었습니다.
부활의 예수님이 너무 사실적이었기에 부인하려야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주님을 대적하던 자 중에서 이제는 주님을 위해 일하는 자로 변신한 것을 보고 사람들이 미쳤다고 했습니다.
13절-그 말이 바울의 귀에까지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 말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는 정말 미쳐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께 중독(中毒)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왜 이런 열성분자가 되었나, 미칠 수밖에 없는 심정을 14절에서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 도다”
미친 듯 주님을 위해 살 수밖에 없는가? 하나님의 강권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강권”(强勸)이라는 말은 세 가지 뜻이 있습니다.
“둘러싸고 밀어 낸다.”-나를 강렬한 힘으로 한 쪽으로 밀어붙이는 것입니다.
“붙든다.”-엄청난 괴력으로 꼼짝 못하게 나를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강력한 인도한다.”-어느 목적지 방향으로 힘차게 나를 끌고 간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이런 단어들이 바로 불가항력적 은혜입니다. 거절할 수 없는 은혜, 대항할 수 없는 은혜-내 의지와는 관계없이 끌려가는 은혜, 이게 불가항력적 은혜입니다.
우리 중에는 처음부터 지금처럼 믿음생활을 하려던 분들은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냥 마음이 답답해서, 하도 일이 안 되어, 자식들의 교육 문제 때문에, 부부간의 불화를 종교로 해결해 보기 위해서,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건강 때문에 나왔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적당한 선에서 다니려 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 어떤 분들 경우에는 분명한 계기가 있었고 어떤 분들은 자신도 모르게 점점 빨려 들어감을 느낍니다.
어느 날, 교회 안에서의 자신을 돌아보니, 모든 교회의 가르침을 다 수용하고 있습니다. 그냥 믿어지는 것입니다. 부인하고 있었던 모든 교리들이 자연스럽게 마음에 와 닿고 과학적이냐, 이성적이냐에 관계없이 그냥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 일에 열심을 내는 자신을 발견하고 깜짝 놀랍니다. 내가 언제 이렇게 되었나? 나도 모르게 사전의 동의도 없이 은혜를 받아버린 것입니다. 은혜를 받은 줄도 모르게 은혜를 받아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입니다.
기독교는 이런 은혜가 있었기에 주후 300년 만에 로마제국을 점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루아침에 콘스탄틴 대제에게 불가항력의 은혜를 내리니까 왕도 어쩔 수 없어 기독교를 공인합니다. 선택된 사람들에게는 때가 언제냐에 달려있지 때가 되면 불가항력적 은혜로 그들을 부르시며 굴복시키십니다. 이게 있기에 우리에게 기대와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2. 성경의 역사는 불가항력적 은혜의 역사입니다.
아담-하나님은 그에게 일방적으로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노아-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하나님께서 조건 없이 그를 불렀습니다.
다윗-그냥 부르셔서 그를 왕으로 삼으셨습니다.
이런 은혜들이 찾아 올 때에 그들은 저항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선물로 받는 길 밖에는 없었습니다. 피하려야 피할 수가 없는 외딴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부르시고 은혜를 주셨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는 고백은 베드로 자신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도마-“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는 고백은 자신도 모르게 나온 것입니다.
루디아-빌립보교회의 주역이 된 귀부인 루디아, 그가 바울의 말을 듣게 되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그래서 그 날로 루디아는 처음 복음을 받아들이자마자 온 가족의 세례까지 받았습니다. 아침에 집을 나설 때만해도 상상도 못하던 일들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주께서 마음을 열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마음을 연다는 것은 저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게 되었고 바울의 말씀을 믿어지게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처럼 불가항력적 은혜입니다.
제주도 초대선교사인 이기풍은 전도지로 코 섞는다는 말에 그냥 무너졌습니다.
단군교 교주 김해경씨-박정희 대통령의 죽음을 예언하고 전두환씨가 대통령 된다는 것을 예언해서 유명해진 무당의 총수, 3천명의 무당을 가르쳤던 사람이 어느 날 주님 앞에 꼬꾸라졌습니다. 그는 하나님께로 돌아와 <주여! 사탄의 왕관을 벗었나이다>는 책을 썼고 지금은 목사가 되어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폭적인 은혜입니다.
(이런 분들, 너무 일찍 강단에 세우고... 이런 일들은 조심성있게 해야 합니다. 대도 조세형씨 같은 사람 보세요. 기독교신앙으로 회심했다 했는데 이후의 행적이 한국교회를 우롱한 격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
고재봉 같은 사람들, 사형수들, 주님에게 잘못을 회개하고 믿음으로 눈으로 천국을 바라보며 갑니다. 불가항력적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몰려올 때 아무도 저항할 수 없고 거절할 수 없습니다. 이 말은 중생과도 연관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중생시킬 때 우리와 상의하거나 우리의 협력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예수님께서 단독적인 역사로 살려내셨던 것처럼 우리를 구원하실 때 하나님은 일방적인 은혜로 중생시키십니다. 이것이 장로교의 가르침입니다.
3. 은혜로 구원받았으니 은혜를 사모하고 나눠야 합니다.
이런 은혜가 우리들에게 임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어 은혜를 못 받았다고 하지만 하나님이 믿어지는 은혜, 교회에 나와지는 은혜-이것처럼 큰 은혜가 어디 있습니까?
지금까지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 받았습니다. 그러면 이제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역시 하나님의 은혜에 거해야 합니다. 은혜로 구원을 받은 우리가 은혜를 키워나가지 못하면 우리 믿음은 자라지 못한 믿음입니다.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는 믿음입니다. 열심이 있지만 방향이 잘못된 거-이것이 광신(狂信)입니다.
성경은 1189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그 구절들은 얼마나 많겠습니까? 이 수많은 구절들을 둘로 나누면 요한복음 3:16과 갈라디아서 2:2입니다.
요 3:16절은,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무엇을 해주셨나? 를 말합니다.
독생자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과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하나님의 양자(養子)가 되고 영생을 누리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이 구절 속에 지금까지 네 번을 듣고 있는 장로교 교리-전적타락, 무조건적 선택, 제한적 속죄, 불가항력적 은혜의 교리들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중요한 또 하나의 구절이 갈라디아서 2;2입니다.
이 구절은, 이제는 내가 주님을 위해 어떻게 살 것인가? 를 말해줍니다. 주님을 위해 산다는 것은 십자가의 길이요, 이는 자기희생이요 포기요 섬김이며 순종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구원을 받은 내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그 답은? 나도 불가항력적으로 은혜를 계속 누리려하고 불가항력적 은혜를 계속 이웃에게 나누려고 몸부림을 쳐야한다는 것입니다.
불가항력적 은혜를 계속 받는 길-교회 안에서 받는 길 밖에 없습니다. 예배와 찬양과 교제, 기도, 헌금-특히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받으려고 해야 합니다. 말씀의 은혜가 임할 때에 저항하지 마세요. 우리 심령이 강퍅해집니다.
말씀 앞에서는 무조건 내가 듣겠나이다! 하는 심정을 가지세요. 말씀으로 나를 친다고 하지 마세요! 말씀 앞에서 어떻게 나를 아실까? 모든 것을 잠재하고 은혜를 받으세요! 그래야 은혜 안에서 자라게 됩니다.
그동안 영략교회가 상당히 분열된 모습을 보여 왔습니다. 그 전에 옆의 건물을 사야하는 데 60억 정도 나간다고 합니다. 한 장로님이 결사적으로 반대했습니다. 교회는 할 수 없이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값을 치르고 옆의 건물을 구입했지만 처음 건물에 막혀 영 보기가 싫었습니다. 반대한 분이 나중에 미국 이민을 가서 어느 목사님(이중표)이 왜 반대했냐고 물었더니 “그냥!”이라는 것입니다. 괜히 반대하고 싶어서!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속에 이것이 교회의 유익인데, 그렇게 해야 하는 데 괜히 반대하고 싶고, 괜히 하고 싶지 않아 고집을 피웁니다. 이것이 은혜를 거절하는 삶입니다. 불가항력적인 구원의 은혜, 중생의 은혜는 내가 거절할 수 없지만 마음의 은혜는 내가 거절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구원은 취소되는 일은 없으나 사역은 취소되고 은혜를 누려야 될 사람들이 은혜를 거절하면 세상 사람들보다 더 못한 고집쟁이가 됩니다. 이런 경우를 가리켜서 바울은 “너희가 성령의 은혜로 시작했다가 육체의 소욕으로 끝내려 하느냐?”고 책망합니다.
지난 세기, 사단은 교인들을 술집으로 끌어들여 타락하도록 했으나 이제는 교회 안에 들어와 은혜 없는 사람들을 내세워 교회를 소란스럽게 하고 분쟁을 야기 시키고 자멸(自滅)을 선택했고 그런 방법은 지금 성공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은혜를 받는 곳입니다. 왜냐? 우리가 불가항력적 은혜로 구원을 받았기에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은혜생활을 놓치면 구원받은 기초가 무너지기에 구원의 모양만 있을 뿐 은혜의 능력을 나타내지 못합니다.
교회 안에서는 은혜를 받으려 하세요! 어떤 교인들이 좋은 교인인가? 목사에게서 은혜 받는 교인이 좋은 교인입니다. 목사가 그 교인에게서 은혜를 받는 교인이 좋은 교인입니다.
어떤 장로님이 좋은 장로님인가? 목사에게서 은혜를 받는 장로님이 좋은 장로님입니다. 장로님에게서 목사가 은혜를 받을 때 좋은 장로님입니다. 이게 없으면 교회는 무너집니다.
우리가 불가항력적 은혜를 받았기에 불가항력적 은혜로 이웃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야 합니다. 이해가 안 되고, 용서가 안 되고 용납이 안 되어도, 우리가 받은 은혜와 사랑을 생각하세요. 그것은 불가항력적 은혜입니다. 그러기에 조건 없이, 이유 없이, 은혜를 베풀어야 합니다.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으면, 우리가 예수에게 제대로 미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강권하심이 없이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맨 정신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제대로 미쳐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가 제대로 은혜로 사는 사람들이 됩니다.
결론
사람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사람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총은 일방적입니다. 구원받을 사람들에게 구원의 은총을 주실 때에 우리가 믿을 수 있고 믿어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러기에 장로교인들은 입 끝에 하나님의 은혜를 달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 구원-하나님의 은혜, 교회에 나오는 것-하나님의 은혜, 예수 잘 믿는 사람-은혜가 있는 사람… 입술에 달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손과 발에 달고 살아야 합니다. 은혜로 구원받았기에 우리도 은혜를 베풀면서 살아야 합니다. 은혜를 사용하지 못하면 은혜는 죽고 자아만 강해집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는 공급이 안 됩니다. 은혜가 죽은 그리스도인들, 은혜의 강물이 말라버린 장로교인들-바리새인교인들입니다. 최악의 교인의 표상입니다. 우리가 더욱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그 은혜를 나눠주며 살아갑시다!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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