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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설교

장로교는 무엇을 믿는가?② -전적타락(로마서 3:19~22)

by 조직신학 교리설교 2023. 5. 10.

 

 

 

장로교는 무엇을 믿는가?② -전적타락

로마서 1장 28~32절

 

 

 서론

 

 

성경은, 죄의 바이러스가 인간의 영과 정신과 육체에 침투해서 하나님의 영이 임재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버렸다고 합니다. 이런 존재로는 누구든 하나님을 알 수 없고 자력(自力)의 힘으로는 하나님을 찾아갈 수 없고 자신의 노력으로 의(義)를 얻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 보기에는 외양이 그럴듯한 컴퓨터이지만 바이러스가 먹으면 쓸모없는 정보가 되는 것처럼 인간의 행위가 하나님 보시기에는 죄로 부패한 성품 위에 덧입힌 것이기에 고물차에 페인트 한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마치 쉰밥으로 돼지고기 소고기 넣고 비빔밥을 해도, 먹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쉰 물에 맛있는 커피를 타도, 주스를 만들어도 쉰 물로는 맛을 낼 수 없는 것처럼 범죄한 인간이 아무리 애쓰고 덕을 쌓아도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님을 흡족(열납)시킬 만한 기준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인간은 부패한 존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부패하고 잔인하고 타락한 존재인가-중국에서, 산(生) 원숭이 골을 먹는 코스가 있었답니다. 관광객이 원숭이 하나를 지명하면 그 원숭이는 이미 알아차려서 뒤로 뺀답니다. 그러면 다른 원숭이들은 앞으로 밀어낸답니다. 그가 죽지 않으면 내가 죽습니다.

 

그 원숭이는 눈물을 질질 흘린답니다. 사람은 그 골을 먹고…. 얼마나 잔인합니까? 사람은, 남의 살을 날 것으로도 먹고 지져먹고 볶아먹고 구워먹고 튀겨먹고… 그 잔인성이라는 것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히틀러는 6백만 명 이상을 독가스실로 보냈습니다. 원죄가 아니면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1.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입니다.

 

칼빈의 5대 교리 중 첫째가 인간의 전적 부패, 혹은 완전 타락입니다. 전적부패는 컴퓨터에 바이러스가 생겨서 저장된 파일을 못 쓰게 만들어 버린 것과 같습니다. 컴퓨터에 바이러스가 침투하면 아무리 고급 정보가 저장되었어도 못 씁니다. 인간은 원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죄성(罪性)이 없는 거룩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동물과 달리 인격적인 존재입니다.

 

인격은 지․정․의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지식(知識)으로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경배하며 섬겼습니다. 인간의 감정(感情)은 깨끗했습니다. 옷을 벗었으나 부끄러움이나 유혹을 받지 않았던 에덴의 상태는 얼마나 정결한 신부였습니까? 인간의 의(意)는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자유의지가 있었고 자유의지로 선한 행동을 했습니다. 인간은 100% 완전한 의인이고 죄없는 상태였습니다.

 

어느 날, 인간에게 죄가 들어왔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불순종으로 인해 타락한 것입니다. 어느 정도의 타락인가? 완전하게 타락했습니다. 이 타락 속에는 도덕적인 타락보다는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부패요 타락입니다.

 

인간은 스스로는 하나님을 생각해 낼 수도, 하나님을 향해 선을 행할 수도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고치거나 노력해서 쓸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완전히 복구 불가능한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사람들에 대해 효도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할 수 있는 도덕적 의(義)는 어느 정도 남아 있어도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식, 하나님을 지각할 수 있는 신적(神的)기관이 완전히 파괴되고 만 것입니다.

 

죄는 무엇을 건드려 버렸는가? 감정이나 의지보다는 지식-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지식을 건드렸습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영적박약아가 되고 만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제대로 섬길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대신 피조물이나 동물이나 사람을 하나님으로 경배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경배하지 못하는 것-이것이 죄 중의 죄입니다. 

 

28절-마음속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인간이 하나님 앞에 죄인의 신분이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하나님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무지, 불신-이 세상의 중심이 나인 것처럼 생각하고 하나님 없이도 넉넉히 살아가는 것이 죄입니다. 자신을 우주의 중심으로 놓고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려는 것이 죄입니다. 죄인 줄도 모르고 죄의 지배를 받으며 죄의 경향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물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컴퓨터에도 보니, 신(神)이라는 글자가 교회 컴퓨터에는 네 번째에, 집의 컴퓨터에는 12번째에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대하는 인간의 마음입니다. 이것이 죄 중의 죄입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 속에 온갖 죄성들로 가득 채워지게 되었습니다. 29절 이하의 말씀을 보십시오.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이런 죄성들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사람들에 있습니다. 짐승에게도 그 어떤 피조물 중에도 이런 죄성들이 없습니다. 동물로 따진다면 무시무시한 동물입니다.

 

인간 속에 이런 야수성이 있습니다. 짐승도, 제 자식을 제 손으로 죽이는 동물이 어디 있고, 보험금을 노려 부모나 남편이나 아내를 죽이는 동물이 어디 있고, 폭탄을 만들어 수많은 사람들을 한꺼번에 몰살하는 동물이 어디 있습니까? 이런 야수성이 전적 타락의 흔적으로 누구에게나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한신교회의 이중표 목사님은 성자(聖者)라고까지 하는 그 분의 책 <나는 매일 죽는다>를 보니, 그분에게도 죄성이 있었습니다. 전북 옥구에서 목회할 때 30대 젊은 목사 시절, 자전거로 심방 가면서 서울에서 내려온 아름다운 아가씨 곁눈질하다가 논바닥으로 곤두박질 당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서울에서 목회할 때 교회에 분란이 일어나 상대방 찬양대원을 향해 성경책을 집어던져 결국에는 옆의 대원이 피를 흘려 당회장의 권한을 박탈당하고 사임도 했습니다.

 

이런 게 우리 속에 숨겨져 있는 전적 타락의 본성입니다. 우리는 이런 존재입니다. 내 속의 어떤 짐승이 튀어나올지 모릅니다. 사자가 나올지, 여우가 나올지… 그래서 존 화이트(John White)는, “사람은 마음속에 모두 맹수를 키운다.”라고 했습니다. 

 

새벽기도회 시간에도 말했지만, 교회 안에서의 농담을 들을 때 아슬아슬합니다. 농담이라는 것은 말하는 사람도 상대방도 옆에서 듣는 사람도 웃고 재미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 남 집사님들의 농담 들으면 “조크”가 아니라 듣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 찌르는 게 있습니다. 이런 것도 모두 전적 타락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함께 건전한 유머교회를 만듭시다!

  

 

2. 인간은 죄인 됨을 고백할 때 하나님에 대한 의식이 뜨이게 됩니다.

 

사람은 자기 눈으로, 자기 마음으로, 타인의 평가로는 자신을 모릅니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 설 때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알게 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대해야만 자신의 죄인 됨을 압니다. 하나님이라는 렌즈가 아니고서는 자신이 죄인 됨을 모릅니다. 

 

다윗은 범죄 했을 때 하나님을 대하여, 모태 중에서 출생한 죄인이라 울부짖었습니다.

이사야는 성전에서 하나님을 뵙게 되었을 때 자신의 죄성을 고백합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존재 앞에 설 때에 비로소 “나를 떠나소서! 죄인입니다!” 고백합니다.

바울도 자기 속에 선(善)을 행할 힘이 없다고 절규합니다.

 

-모두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때 그런 고백을 한 것입니다. 이런 고백과 함께 비로소 믿음의 첫 걸음을 시작합니다. 이런 자의식이 없으면 우리 믿음은 종교지식에 불과입니다. 

 

<갈대상자>라는 책을 보니, 한국 최고의 과학자인 김영길 박사가 나사(NASA)에 있을 때 주님을 알았지만 과학자에게 성경은 너무 비과학적이었습니다. 물이 편하여 포도주가 된다? 지금까지 이런 핵융합 반응이 일어난 적이 없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으로 5천명 먹인다? 과학의 기본 법칙인 “질량보존의 법칙”에 어긋난다고 생각했기에 도무지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며느리를 처음 선 본 자리에서 시어머니 될 사람은 “성품이 성자 같은 아들”이라 했습니다. 가훈은 “어리석어도 좋으니 어질어라”입니다.

 

이런 집안에서 태어난 김영길 박사가 어느 날 그의 영혼 속에 움직임이 일어났습니다. 성경을 읽고 신앙서적을 읽으며 주님을 깊이 체험하기를 원하는 그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신 것입니다.

 

처음 느껴진 감정은 “아, 나는 죄인이었구나! 죄인인 나를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아들을 보내셨구나!” 바로 그거였습니다. 그때부터 최고의 과학자는, 하나님과 성경은 비과학적이 아니라 초(初) 과학적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제대로 예수를 믿게 되면 처음 내 마음 속에 들어오는 것은 죄의식입니다. 사람들에 대한 죄의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죄의식입니다. 갑자기 나는 하나님 앞에 초라하고 내 속에 온갖 죄로 가득 찬 죄인임을 알게 됩니다.

 

그냥 죄인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부패하고 전적으로 타락한 죄성으로 가득 찬 존재입니다. 나는 주님 앞에 내놓을 의가 없고 주님 앞에서 나는 영적인 거지입니다. 그리고 고백합니다. “주님! 내가 죄인입니다!”

 

그냥 죄인입니다. 지금까지 나는 내 죄를 보지 못하고 사람들의 죄만을 보았고 내가 죄인이라는 깊은 죄의식이 없었기에 주님을 향한 영적인 부르짖음도 간절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게 될 때 내가 하나님 없이 스스로의 인생에 주인이 되어 살아온 죄인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나는 전적으로 부패하고 타락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3. 예수 그리스도만이 새로운 피조물로 만듭니다. 

 

이제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죄인은 절대로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습니다. 죄를 없애야 합니다. 그러나 이 죄는 너무 깊어 내 선행으로 고침 받을 수 없습니다.

 

알미니안주의는 전적인 타락이 아니라 부분적인 타락을 말합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남아있는 도덕심으로 열심히 노력하면 죄를 사함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감리교, 성결교입니다.

 

로마 가톨릭은 인간의 수행과 공덕을 통해 죄인에서 의인된 자리로 나간다고 합니다.

 

칼빈주의는 인간의 전적 타락을 말합니다. 완전히 타락했기에 인간은 스스로 구원을, 죄사함을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어느 정도로 타락했는가? 인간이 숯덩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숯은 아무리 씻고 닦아도 숯입니다. 숯에서 흰 것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선행을 하고 도덕적인 삶을 살아도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걸레로 길바닥을 닦아보세요. 아무리 닦아도 걸레는 걸레입니다. 걸레가 깨끗한 수건이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했고 타락했기에 아무리 선행을 해도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없습니다.

 

스미드(smith)는 이런 예화를 사용했습니다. 어느 의사가 해적 섬에 붙잡혀 갔습니다. 의사는 해적들의 상처를 다 고쳐주었습니다. 의사는 해적들에게 성자라는 칭호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해적들 사이에는 아무리 성자라는 인정을 받았어도 왕의 입장에서는 그의 선행이 어떻습니까? 선행이 선행으로 칭찬을 받을 만합니까? 그가 선행을 할수록 왕에게는 해악을 하는 것입니다. 왕의 입장에서는 해적이나 해적들에게 성자라는 존경을 받고 있는 의사나 모두 반역자입니다. 

 

하나님 앞의 인간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인간이 아무리 선하게 살고 착하게 산다 해도 그것은 사람들의 의(義)의 수준입니다. 사람들의 의의 수준으로는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 될 수 없습니다. 구더기가 자기들 딴에는 잘난 놈도 있고 깨끗한 놈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눈에는 다 구더기입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하늘도 더럽다고 했습니다. 하물며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 인간들이 스스로 자신을 개조하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사막에 묻혀있는 바늘을 시각장애자가 찾아 나서려는 것과 같습니다. 얼마나 불가능한 일이니까?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자력으로 구원을 찾아나서는 길은 더 어렵습니다.       

      

바울은, 죄와 깊은 갈등을 했습니다. 그러나 죄는 갈등을 통해서 극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죄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만 죄 씻음 받을 수 있습니다.

 

(복음송을 부른다.)

“보혈을 넘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약간의 죄인이 아니라 완전한 죄인입니다. 주님! 제 힘으로는 주님 앞에 나갈 수 없습니다. 제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갑니다. 십자가의 보혈로만 저를 정결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죄의 본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주님, 저를 긍휼이 여겨주십시오! 주님, 저에게 긍휼을 내려 주옵소서!”

 

눈물과 함께 주님 앞에 설 때 그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죄사함의 은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숯덩이를 하나님은 깨끗한 보자기로 싸주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중생한 사람들입니다. 중생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생명을 이식(移植)한 사람들입니다.

 

 

결론

이제 우리는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은혜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타락했던 우리 속에 주님의 빛이 들어왔고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전적으로 타락했던 심령 속에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죄사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전적으로 타락했을 때 본성이 되었던 죄는 아직도 우리 가운데 존재해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훌륭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 갈 것입니다. 이것이 장로교입니다. 장로교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입니다. 하나님 없이는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가 되고 하나님의 은혜가 있으면 그 은혜로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 등급을 올릴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장로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