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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설교

장로교는 무엇을 믿는가?⑦ -하나님의 절대주권(로마서 11:33~36)

by 조직신학 교리설교 2023. 5. 31.

품절. 중고서적에서

장로교는 무엇을 믿는가?⑦-하나님의 절대주권

로마서 11장 33~36절

 

  

서론

몇 주 동안을 연속으로 "장로교란 무엇인가?"로 설교를 했습니다. 그동안 장로교의 근간(根幹)을 이루는 칼빈주의 5대 교리-전적타락, 무조건적 선택, 제한적 속죄, 불가항력적 은혜, 궁극적 구원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이 설교는 장로교의 우월성을 말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서 흔들리지 않는 구원을 늘빛가족들에게 심어주려고 한 것입니다.

 

장로교 안에도 감리교적인 구원관-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교리를 갖고 있는 분들이 있고 감리교 안에도 장로교적인 구원관-하나님 중심의 믿음을 갖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칼빈주의적 감리교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어느 교리가 우수하냐보다는 어느 것이 우리의 구원관을 바로 세워주고 받은 구원을 풍성히 누리며 사는 데 얼마나 효율적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은, “장로교란 무엇인가?”의 설교 시리즈 중 예정론에 대해서 말씀을 드립니다. 장로교의 예정론처럼 찬사(讚辭)와 비난을 동시에 받은 교리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정론은 정답이 없는 오묘한 교리입니다. 

 


1. 장로교는, 우리 구원의 일체가 하나님의 예정 하에 있다고 합니다.

 

이 말은 모든 구원이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되고 하나님의 책임 하에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 구원은 하나님의 예정 하에 있다고 해서 “예정론”이라고 합니다. 예정론. 가장 애매하고 신학적인 논쟁이 있어왔습니다.

 

어떤 사람은 구원하기로 예정해 놓으시고, 어떤 사람은 그냥 버리셨는가? 이해와 설명이 쉽지 않습니다. 성경은 분명 예정론이 맞는데 현실은 너무 일방적이다, 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장로교 시리즈를 설교하는 동안 한 청년이 장로교에 대한 궁금증을 노트 다섯 쪽 분량에 적어서 가져왔습니다. 제가 일일이 해답을 적어서 보냈는데 나중에 그 청년의 허락을 받아 여러분들에게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아직 허락을 받지 못해서!

 

그만큼 장로교 교리는 궁금증과 이해되지 못하는 부분들이 많습니다. 저도 신학생 시절에 예정론으로 고민을 많이 했었습니다. 지금도 모두 이해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성경이 예정론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믿지 않을 수가 없고, 가르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곳으로 가고 성경이 멈추는 곳에서 멈추라! 이것이 개혁주의의 성경관이기 때문입니다.

 

예정론 교리를 체계화시킨 칼빈은 예정론 교리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경은 성령이 교사로 있는 학교의 교실이다. 성경에는 신자들이 알아야 하고, 필요하고, 유용한 것은 하나도 간과된 것이 없는 것처럼 필요한 것 이외에는 말하지 아니한다. 성경이 예정을 말하기 때문에 우리도 예정을 말해야 한다.”

 

인정하든 안하든, 이해가 되던 안 되든, 성경은 예정을 말합니다. 구원받을 자를 예정하고 악한 천사와 선한 천사를 예정하고, 인간의 모든 삶이 예정되고, 국가의 흥망성쇠가 예정되고… 숨 막히는 이야기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예정하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정을 믿는 것은, 칼빈이 창안해서가 아니라, 성경이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뉴톤이 말하기 전에도 만유인력의 법칙이 있었듯이, 칼빈이 예정을 말하기 전에도 성경 안에는 이 진리가 있었습니다. 누가 하늘에 별이 있느냐고 물으면 무수한 별이 있다 대답할 것입니다. 바다에는 고기가 무수히 있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성경에 예정교리가 있느냐고 물으면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은 이 교리로 가득 차 있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에베소서 같은 신약성경은 예정론의 첨병입니다. 에베소서에서 예정(豫定)을 빼버리면 에베소서 성경도 없습니다. 그만큼 에베소서의 저자인 바울에게도 예정론은 사실입니다.

 

바울은 에베소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엡1:4)라고 합니다. 우리를 어떤 사람들로 선택했다는 것입니까? 구원의 백성으로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생하기도 전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됩니다. 그들은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이스라엘 백성들로 출생했다면 그 자체가 택한 백성입니다. 그래서 선민(選民)이라고 합니다. 선민은 선택된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선택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들은 운명적으로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태어나서 어느 정도가 되면 율법을 지키며 살기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계명을 지키며 살기로 하나님을 선택합니다. 저들의 선택이 있기 전에 하나님의 선택이 먼저 있었기에 저들의 하나님 선택이 가능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하셨고 나머지 백성들은 내버려두셨소? 항의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권한이자 주권입니다. 

 

5절에는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라고 합니다.

무엇을 예정하셨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받은 자들을 구원해 주시기로 예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선택과 구원은 성경적인 언급이 너무도 분명하기에 안 믿으려야 안 믿을 수가 없습니다. 이론적으로 이치적으로 예정론이 용납이 안 되어도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기에, 성경이 말하고 있기에 우리는 수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의 절대적 권위-이것이 장로교입니다.   

 

장로교의 예정론은 우리 구원이 우연히 되어지는 것도 아니고 우리의 선택으로 되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 하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결국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 하에 들어있지 않다면 우리는 절대로 구원을 이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 우리는 전적으로 부패하고 완전 무능력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예정론을 부인하고 구원은 내 의지에 따르는 것이라 믿고 싶지만 성경의 사상은 예정론입니다. 성경의 어떤 인물이 하나님의 부르심과 도우심이 없이 스스로 하나님께 나가고 구원받은 사람들이 있습니까? 아브라함, 야곱, 요셉, 다윗, 베드로, 바울 등 모두가 하나님의 예정하심 가운데 부르심을 받고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 쟁쟁한 믿음의 영웅들조차도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고 구원을 받은 경우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장로교는 구원의 주체(主體)를 사람에게 두지 않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단독적인 역사입니다. 구원을 위해 우리가 한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구원에 관한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소관이고 하나님의 주권 하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정론도 결국은 하나님의 주권을 말하고 있습니다.

 

 

2. 장로교의 예정론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말살하는 것입니까?

 

그러면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반문할 것입니다. 구원이 하나님에 의해 예정되어 있다면, 우리가 구원을 위해 열심을 낼 것도 없고 교회에 열심을 내어 다닐 필요도 없는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냥 놔둬도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시기로 작정하셨으니까 우리가 신앙생활에 굳이 열심을 낼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즉, 구원에 대한 인간적 노력의 모든 동기를 제거해 버린다는 비판론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예정이라는 교리만 있으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구원해 주시기로 예정하신, 예정 프로그램만 내 구원 역사에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미리 예정된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것이 불가항력적 은혜이던지 내가 열심을 내어서 얻어지는 은혜이든지 은혜가 우리 가운데 임하면 우리 속사사람은 그냥 있지 못합니다. 주님을 위해서 열심을 내고 구원받음을 위해서 감사하고 더 충만한 믿음으로 역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인간의 자유의지를 더욱 적극적으로 활용하게 되고 하나님의 선한 동역자가 되려는 의지로 불타오르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작정이 어떻게 되어 있는 것을 인간은 모르기에 어떠한 일에 성실히 수고해야 하고 땀을 흘려야 합니다. 바로 내가 그런 일에 헌신하고 땀 흘리도록 작정되었다는, 작정을 더 선하게 적극적으로 이해하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어떤 분들은, 예정론이 맞는다면, 굳이 전도할 필요가 없지 않냐고도 합니다. 구원의 예정 프로그램을 따라 구원받을 때가 되면 알아서 구원을 받는 데 왜 전도하려고 돈 쓰고 목숨까지도 잃으냐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예정해 놓지 않으시면 우리가 아무리 전도해도 소용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정을 믿는다면 가만 기다리는 게 옳은 일 아니냐는 것이지요.

 

여기에도 구원받을 사람들이 누구에 의해, 즉 한국선교사들의 선교에 의해, 나의 전도에 의해 주님께로 돌아오도록 되었다는 적극적인 믿음으로 전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전도자로 예정해 놓으셨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예정 하에 전도할 때는 그 수고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충분히 보상해 주시고 상급을 주시기에 더욱 전도하게 됩니다. 

 

 

3. 장로교의 예정론이 주는 유익이 무엇입니까?

 

예정론은 신학적으로 궁금증도 많고 논리적인 모순들도 많아 보이는 게 사실이지만 예정론이 주는 신앙적 유익은 큽니다. 우리가 구원의 예정론을 믿게 될 때 어떤 유익이 있는가?

 

㉠ 예정론은, 구원을 확신하게 됩니다.

 

구원이 내 손에 있다면 불안하지만 하나님의 손에 서 우리 구원이 이루어지고 있다면 언제나 확신 가운데 살게 됩니다. 감정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뢰하게 됩니다. 상황에 따라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구원을 맡겨버리기에 구원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29절. 하나님의 부르심에는(예정하심을 비롯해서) 후회하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예정론의 믿음이 우리 믿음을 더욱 든든히 세워줍니다.

 

우리가 믿음의 초보일수록 내 힘과 수고로 노력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구원을 얻기 위한 믿음의 노력을 경주합니다. 그러다 믿음이 깊어질수록 점점 나의 의(義)는 버리게 되고 하나님의 구원과 예정을 믿게 됩니다. 그게 아니면 도무지 우리 스스로에게는 의(義)가 없음을 절감하기 때문입니다.

 

㉡ 예정론은 나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구원을 예정해 놓으시고 그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사건들을, 역사들을 동원하셨는가를 알게 됩니다. 모태신앙자들-나의 구원 예정을 위해 부모님을 결합시킨 것입니다. 우리 동네에 교회가 서게 된 것은 바로 나를 위해서입니다. 내가 총동원전도 때 교회에 나오게 된 것은 바로 나를 위해 그 전도대회를 연 것입니다.

 

내가 회사의 누구 때문에 전도를 받아서 교회를 나오게 되고 구원의 백성이 된 것은 그 사람이 나 때문에 그 회사를 오게 되고 내가 그를 만나기 위해 그 회사에 취직하게 되었다는, 모든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게 되고 그러면 아내와 자식들과 교우들의 관계가 모두가 의미가 있게 됩니다.

 

그만큼 나는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이 되고 사람들은 모두 나의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아울러 하나님의 관심에 더욱 관심을 갖고 기대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예정해 놓으셨을까? 하는 기대감 말입니다.

 

㉢ 예정론은, 전도에 대한 적극성을 갖게 합니다.

 

나를 통해서 전도 받고 구원받기로 예정된 사람은 누군가, 이웃을 살피고 주변을 살피게 됩니다. 전도가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있기에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합니다. 전도가 되었을 때도 교만하지 않고 아직 전도가 이루어지지 않아도 실망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정론은 숙명론이 아닙니다. 예정론은 적극적인 하나님의 주권이자 간섭론입니다. 내 인생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예정론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더욱 의자하게 되고 더 깊이 신뢰하는 믿음의 세계로 들어가게 됩니다. 역사적으로 예정론을 믿는 사람들이 믿음이 참 좋았습니다.

 

㉣ 예정론은, 바른 선택을 하게합니다.

 

악을 대할 때는 내가 선한 쪽으로 가도록 작정되었음을 믿고 선한 쪽의 선택으로 나가야 하며 선한 일을 만났을 때는 바로 내가 그 일에 적합한 사람으로 작정되었다는 마음으로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작정 교리에 대해서 좋은 쪽으로 생각하면 얼마나 이 교리가 우리들에게 유익합니까? 선을 행하고 악에서 나 자신을 지키는 일에 얼마나 긍정적입니까? 예정론은 수동적인 그리스도인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악을 미워하고 선을 위해 헌신하는 적극적인 크리스천 상(像)을 만들어 냅니다.

 

 

결론

 

예정론은 이해의 영역에 속한 교리가 아닙니다. 내 머리로 이해하고 인간의 이성으로 판단될 수 있는 교리가 아닙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판단되기에는 앞뒤가 모순 되는 점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예정론은 하나님의 세계에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아니고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도 없는 영역입니다. 이것은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영역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33절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여기서 “깊다”는 감탄사는 두 가지 뜻을 내포합니다. 하나는 분명히 있기는 한데 우리 눈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 것이며 또 하나는, 확실하기는 하지만 알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부분, 이해하고 있는 부분보다 더 크고 확실한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깊도다”라는 말로 측량이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결국은 36절,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되고 끝을 맺을 것이니 영광, 영광을 올릴 뿐이라고 합니다.   

 

예정론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인정하고 감사하는 교리입니다. 우리의 운명과 생명이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믿고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하는 교리입니다. 그러기에 장로교인들은 감사가 크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