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끝
요한계시록 21장 1~4절
서론
믿음바로세우기시리즈 설교가 오늘 끝납니다.
왜 믿는가? 믿음의 동기(목적),
누구를 믿는가? 믿음의 대상,
무얼 믿는가? 믿음의 내용,
무엇으로 믿을까? 믿음의 원동력,
어떤 자세로 믿을까-믿음의 기본기,
어떤 마음으로 살까, 믿음의 자세,
어떤 정신으로 살아갈까? 믿음의 정신,
믿음생활을 하면서 떤 축복을 받으며 살아야 할까,
믿음의 유익! 언제 책으로 낼 겁니다.
어때요? 여름에 점검해 보니 내 믿음은 바로 세워진 믿음인가요? 성령이 피스톤(piston)역할을 하는 믿음으로 정상 작동 중인가요? 아니면, 장롱면허가 있듯이 장롱믿음은 아닌가요?
오늘은 마지막으로 믿음의 끝에 관한 말씀입니다. ‘믿음’은 취미생활도 아니고 성향도 아닙니다. ‘믿음’은 일생을 걸었던 내 삶의 원동력입니다. 믿음으로 긴 세월을 달려왔습니다. 수고했고 잠자지 못했고 하고 싶은 것들을 절제했고 자신을 포기해야 할 때가 많았습니다.
믿음은 우리 삶의 전부였기에 아름다운 끝이 있습니다. 믿음의 끝을 바라보지 않는 사람들은 믿음의 정도(正道)를 달려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래요, 믿음생활을 하지만 죽음 이후에는 별 관심이 없다고~ 살아가는 데 힘을 얻고 교회 안에서 좋은 사람들 만났고 주일마다 인생에 도움이 되는 교훈들을 얻고 살았으면 되지 그보다 더 큰 욕심을 왜 부리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욕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스코틀랜드에서 호주로 가는 화물선 한 척에 많은 양들과 마른 풀들이 가득 실렸습니다. 호주에 도착 직전, 안개는 자욱한데 양들이 더 이상 마른 풀을 먹지 않습니다. 싱싱한 풀, 생명력 넘치는 풀 냄새를 맡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풀 냄새 맡는 곳입니다. 천국의 풀 냄새, 믿음의 끝에 어떤 일이 생길까? 천국의 푸른 풀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러기에 믿음의 끝에 대해 관심을 갖지 못하다면 죽은 믿음이지 살아있는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1. 믿음의 끝은 인생 수고의 끝입니다.
언제까지 믿어야 하나요? 죽을 때까지 믿어야 합니다. 인생에서 최장거리코스가 믿음코스입니다. 마라톤코스는 42.195km, 울트라 마라톤은 50km, 24시간 연속달리는 마라톤도 있습니다.
친구가 박사 받으러 미국 갔는데 10년이 넘었는데도 아직도 학위를 못 받았습니다. 박사코스도 믿음의 코스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짧은 것입니다. 믿음은 인생에서 가장 긴 레이스(race). 그러나 끝이 있는 레이스(race). 죽으면 믿음도 소용없어요.
믿음은 푸른 하늘로 날아오르는 우주선의 ‘보조 로켓’ 같은 것입니다. 우주선은 보조 로켓이 3단계로 되어있어 어느 선까지 올라가면 하나씩 떨어뜨립니다. 달고 올라갈 필요가 없습니다. 천국에 입성하는 순간 믿음은 효용가치가 떨어집니다. 믿음의 고난, 삶의 수고, 오해, 내면의 싸움… 모두 끝납니다. 믿음이 끝남과 동시에 영원한 안식과 사랑의 세계로 들어가게 됩니다.
믿음이 끝남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수하십니다. 이후부터는 하나님께서 완벽하게 우리의 영생을 책임지십니다. 에덴동산보다도 더 좋은 곳에서 영생합니다!
믿음의 끝에는 이렇게 좋은 세상의 막이 열리기에 믿음은 벗어버리고 영생세계에서 사랑으로 기쁘게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믿음으로 생기는 모든 어려움은 끝! 입니다.
2. 믿음의 끝은 지식의 최고봉입니다.
인간 지식은 한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 인간 세상에서의 의문들… 알지 못함에서 오는 것 때문에 괴로워하고 의문을 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기에 내 미래를 모르기에 하나님을 믿고 인생을 맡기고 삽니다. 불확실에서 살았기에 믿음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대체적으로는 남의 고통에 대해서는 굉장히 대범합니다. 너무 쉽게 답을 줍니다.
“하나님 계시잖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거야~”
내 고통에 대해서는 소심합니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참 어려운 질문입니다. 그래서 종교가 있고 점(占)쟁이들이 있고 운명철학이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남의 고통에는 대범하기에 축소시키고 나의 고통은 소심하기에 과장, 확대시킵니다. 세상에서는 알고 가는 것보다 모르고 가는 게 더 많습니다. 평생 같이 산 남편의 마음, 아내의 마음 다 모르고 갑니다. 부부지만 자존심 때문에, 때로는 부끄러워서? 배우자에게 괴로움을 주지 않기 위해 혼자 떠안고 갑니다. 이러다가 우리 믿음에 끝자락이 옵니다.
그 다음이 천국! 하나님께서 내 모든 것을 아셨듯이 우리도 주님을 알게 됩니다.
“지금은 희미하게 보이나 그때는 주를 맞대고 보리
하나님 나를 알고 계시듯 우리도 주를 알리!”
우리도 주를 알리! 지금은 희미하게 보이나 그때는 분명하게 보입니다. 지금은 흐릿한 거울처럼 보이지만 그때는 또렷합니다! 믿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대면하고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면, 모든 게 다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내 인생의 전 레이스(race)를 순식간에 보게 됩니다. 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한 장면으로 다 들여다보게 됩니다. 내 지식이 하나님의 지혜로 업그레이드됩니다. 지금은 죄로 인해 땅에 맞게 다운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믿음이 필요합니다. 알지 못하기에 믿음으로만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죽음을 통하여 보조로켓처럼 믿음을 떨구게 됩니다. 이제는 믿음이 아니라 직접 대면합니다.
아! 다 드러나요. 내 인생의 미스터리들이 다 들어 나요. 드러나면 “아, 하나님, 왜 그랬어요!” 가 아니라 “그랬군요 하나님” “그랬었군요 하나님! 난 몰랐어요. 하나님께서 왜 그 일을 주셨는지 난 몰랐어요, 하나님!” 이런 고백은 지금 안 나옵니다. 지금은 믿음의 도중이기 때문에! 이런 고백은 믿음의 끝에 나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모든 사건, 사실들을 알게 될 것이고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얼마나 힘써주셨는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천국은 찬양과 영광과 기쁨만 있는 것입니다.
3. 믿음의 끝에는 엄청난 보험료가 나옵니다.
보험은 아무런 일이 발생하지 않으면 큰 재미가 없습니다. 보험은 재난이나 예기치 않았던 사고를 대비해서 있는 것입니다. 없는 사람일수록 보험은 힘이 됩니다.
믿음은 일종의 생명보험이요 천국보험입니다. 중증장애자, 고아들, 맹인들, 인생의 수고로 가득 찬 이들, 사랑하는 이들을 떠나보낸 이들, 천국에서 보험을 찾게 됩니다. 먼저 간 자들을 찾게 되고 가장 아름다운 얼굴로, 멋있는 육신으로, 고생이 없는 삶으로 찾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새하늘과 새 땅에는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1절, 처음 땅과 바다,
4절, 눈물 사망 애통 곡(哭) 아픈 것⋯
천국에는 이게 없습니다. 이것만 없으면 바로 부처가 찾으려고 했던 생노병사가 없는 극락! 이게 바로 천국임을 몰랐기에 그렇게 번뇌하며 번민했던 것입니다. 예수님보다 500년 앞서 출생했기에 이후에 출생했다면 예수 안에서 인간의 번뇌를 해결하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몰랐고 믿음이 없었기에 그를 비롯한 수많은 구도자들이 영생을 찾아 헤맸지만 잘못된 번지에서 서성거리가 간 것입니다.
계시록 21장은 죽은 후에 그리스도인들이 찾을 보험 내역입니다. 이렇게 좋은 보험이 어디 있습니까? 이런 보험을 찾는다 생각하면 내가 왜 더 큰 보험을 들지 않았을까? 아쉬워합니다.
죽음은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믿음이 끝나고 그 끝에는 이처럼 좋은 일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고, 믿음으로 천국에 들어가게 되고 믿음으로 영생을 얻게 됩니다. 믿음으로 인간은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게 되는 영광에 참여하게 됩니다. 굉장한 보험입니다.
믿음시리즈를 설교하는 동안, 히브리대학교 교수 유발 하라리의 책 <사피엔스>와 <호모데우스>, 두꺼운 두 권을 읽었습니다. 모두 진화론에 기반을 둔, 인류사에 관한 내용들입니다.
<사피엔스>는 아프리카에 살던 별 볼일 없던 영장류 호모 사피엔스 인간이 어떻게 이 행성을 지배하게 되었는가? 하라리는 인간이 종(種)을 누를 수 있었던 것은 집단신화를 믿는 독특한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랍니다. 집단신화가 만들어 내는 법, 돈, 신, 국가 등을 믿는 능력 때문에 인간은 대규모로 유연하게 협력할 수 있었고 이것이 사피엔스의 성공비결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앞으로도 호모 사피엔스는 행성을 계속 지배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여기에 대한 답이 <호모데우스>입니다. 인간을 성공시킨 집단신화들이 21세기 신기술과 만날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많은 도구, 사상, 직업들이 사라지지만 신념과 종교는 사라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물론 그가 말하는 종교는 신의 종교가 아니라 인간이 죽음을 극복하고 불멸이 됨으로 인간자력으로 신성(神性)을 지니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죽음 이후에 가는 천국은 더 이상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죽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천국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죽음을 보지 않고 천년만년 살고 싶습니까? 따뜻한 감정과 정서가 사라진 기계적인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 교인들, 부부⋯ 친구들⋯ 할 일도 없고 직업도 사라져 버렸기에 그 남는 시간에 무엇에 몰입하고 만족할 것입니까? 할 일도 없고 가치도 없는 잉여인간으로 살면서 약물에 중독되고 컴퓨터 인터넷, 등의 기계에 노예가 된다면 장수가 재앙입니까? 축복입니까? 인류는 영원할 수가 없습니다. 로봇 등의 기계들이 인간들이 플러그를 뽑아버리면 자기들의 생명도 끝남을 알고 있기에 사전에 인간들을 멸절시킵니다. 제 정신이라면 기계적으로 살아가는 이런 세상을 천년만면 꿈꾸는 사람들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끝은 다릅니다. 우리에게는 굉장한 일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누렸던 것들! 천국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하늘나라에서 엄청난 보상이 기다리고 있으니 얼마나 가치 있는 수고인가요!
4. 믿음의 끝에는 사용 내역서를 내놓아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 나그네로 살다 갑니다. 맨 몸으로 나왔습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잘 살고 있습니다. 실컷 쓰다가는 사람도 있고 아쉽게 모자란 듯 쓰다 가기도 합니다. 그래도 알몸으로 사는 사람,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많든 적든 쓰다갑니다.
빈손으로, 빈 몸으로 세상에 들어온 내가 누구 것으로 쓰다 가는가?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쓰다갑니다. 어떤 사람들은 많이 맡기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작은 것으로 맡깁니다.
내가 주인 같고 결정권자 같지만 마지막 날에는 사용내역서를 내놓아야 합니다. 얼마나 가졌나? 얼마나 썼는가?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누구를 위해 사용했는가? 무엇에 대해 사용했는가? 믿음의 끝에는 믿음의 내역서도 보지만 사용내역서도 함께 제출해야 합니다.
그러니 죽을 때, 장관이 못 되어 억울하다! 박사가 못 되어 억울하다! 이런 탄식은 드뭅니다. “이렇게 살 수 밖에 없었나? 좀 더 남을 위해서 살수도 있는데…” 그걸 아쉬워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식은 믿음의 끝에, 삶의 끝자락에서, 하나님 앞에 나는 보잘것없는 사용내역서를 내놓을 수밖에 없다는 두려움, 부끄러움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남보다 더 많은 것을 가졌고 더 좋은 환경에서 자랐다면? 남들보다 더 튼튼한 육체를 가졌고 더 많은 것을 배웠다면? 우리의 내역서도 남들보다 훨씬 더 남을 위해서 내놓을 것이 많아야 하지 않을까요?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은 피살되기 바로 전 날 만찬회에서, “이다음에 역사의 법정 앞에 설 때에 네 가지의 질문을 받게 된다”는 유명한 연설을 합니다.
‘당신은 참으로 용감한 인간이었는가?’
‘당신은 참으로 현명한 판단력이 있었는가?’
‘당신은 참으로 성실한 인간이었는가?’
‘당신은 참으로 헌신한 인간이었는가?’
우리가 평생토록 사용한 화장품 값보다야 남을 도운 내역서가 더 많아야 하지 않을까요? 내 몸을 건강하게 하려고 투자한 체력 단련비보다는 남을 도와준 내역서 비율이 더 많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 면에서는 우리가 비신자들보다야 내역서가 훨씬 알찰 것입니다. 우리는 헌금하는 사람들이고 그 헌금으로 교회가 대신해서 남을 돕는 일에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1930년대 초 미국은 극심한 불경기로 경제공황이 왔습니다. 한 극장에 <입장무료>라는 팻말이 붙었습니다. 사람들은 웬 떡이냐며 들어갔다 낭패를 당했습니다. 입장료는 공짜였지만 입장료보다 훨씬 더 비싼 퇴장료가 있었던 거예요. 공짜 좋아하다 비싼 대가를 치른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은 자유입니다. 들어올 때는 내 의지와 관계없이 입(入)세상했습니다. 그러나 출(出)세상에는 퇴장료가 있습니다.
“내가 준 것들, 어떻게 썼나? 내 놓아봐라!”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내역서 내놓기 전에 이제라도 믿음의 끝이 오기 전에 우리 인생을 어떻게 사용했는가, 우리의 소유를 어떻게 사용했는가, 사용내역서를 검토해 보시기 바랍니다.
결론
우리 생애의 끝에 내가 찾아갈 세상! 나를 찾아와서 안겨줄 보상들! 우리가 죽음을 넘어 이런 상급을 꿈꾸게 된 것은, 믿음! 믿음으로 온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볼 수 없고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믿음이란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믿음이 없었다면 꿈이나 꾸겠습니까?
이렇게 좋은 믿음, 사실은 선물(膳物)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교인들에게 “믿음은 모든 사람들의 것이 아니니라!”(살후 3:2) 에베소교인들에게는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합니다(2:8).
선물은 아무나 얻을 수 있는 것으로 개방되지 않습니다. 선택된 이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특별한 은총입니다. 공짜로 받은 믿음이라는 선물! 어떻게 응용하고 사용하는가? 그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아무쪼록 큰 믿음들을 가지시고 믿음의 끝에 좋은 날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 안내자로 늘빛교회는 여러분 곁에, 여기에 있습니다. 믿음바로세우기 시리즈설교가 여러분에게 큰 힘이 되었으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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