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마음
요한복음 13장 34, 35절
서론
믿음바로세우기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1주 왜 믿는가-믿음의 목적,
2주 누구를 믿는가-믿음의 대상,
3주 무얼 믿는가-믿음의 내용,
4주 무엇으로 믿을까? 믿음의 원동력,
5주 어떤 자세로 믿을까-믿음의 기본기에 관한 것입니다!
오늘은 여섯 번째 시간으로 어떤 마음으로 살까,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자세입니다.
일본기독교는 우리보다 20년 정도 앞섭니다. 일본인구은 1억3천, 크리스천은 1%(0.4%. 51만명)이하입니다. 숫자적으로는 부흥하지 못해 일본교회는 작지만 강한 교회를 만들어냈습니다.
한국교회는 통계청 조사로 5천만 인구에 967만명, 19.7%입니다. 국민 5명 중에 1명은 기독교인입니다. 엄청난 숫자입니다. 그러나 신뢰도에서나, 영향력은 어떤가요? 한국교회는 알게 모르게 많은 봉사와 국가에 기여를 하면서도 ‘이미지’면에서 낙제점입니다. 자살골이 많습니다.
일본교회는 “어떻게 믿을까?” 보다 “어떻게 살까?”를 강조합니다. 그러다보니 생활은 좋은데 기독교의 유일신사상이 약합니다. 신앙과 관계없이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좋아합니다. 기독교를 믿지 않으면서 예배당 결혼식을 로망으로 생각해요! 한국 젊은이들이 조명이 화려한 예식장을 선호하듯 일본인들은 작은 예배당을 선호해요. 기독교의 절대성보다는 정직하고 단정한 크리스천상(像)을 강조하다보니 인정은 받는데 차별화는 안 됩니다. 그 종교가 그 종교입니다.
한국교회는 “어떻게 믿을까?”를 엄청 강조합니다. 그래서 믿음은 1급입니다. 목사들보다 믿음 좋은 분들이 태산을 이룹니다. 문제는 “어떻게 살까?”를 강조하지 않았기에 생활이 약해요! 아멘! 은 잘하는데 아멘 이후, 실천이 없다는 거예요. 그러다보니 빛과 소금의 역할을 못하고 오히려 잘 믿는 것만큼 비판의 대상이 됩니다. 교인들이 그들보다 못 살아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그 좋은 교훈을 갖고도 왜 우리보다 높게 못 사냐? 라는 주문입니다. 할 말 없는 거지요!
그래서 믿음이 좋은 사람이 좋은 사람이다, 기도가 좋은 사람이 좋은 사람이다, 교회 열심하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다! 이런 평가를 제대로 못 받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 좋은 믿음들이 아까워요! 믿음은 좋은데⋯ 하는 행동은⋯ 마음씀씀이는⋯ 뒷이야기가 좋게 이어져야 하는데 좋은 점수를 받지 못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와 넓은 길에서 살아버리기 때문입니다.
바른 믿음은, “어떻게 믿어야 할까?”와 “어떻게 살까?”도 같이 중요합니다. 믿음생활에서 “어떻게 믿을까?”에 대해 평생을 고민하고 연구해야 합니다. 열심히 기도하는 법을 배웁니다. 그러나 “어떻게 살까?” 에 대한 연구는 없습니다. 이게 한국교회가 극복해야 할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어떻게 살 것인가? 에 대한 계명을 주셨습니다. 계명은 구원을 위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내 행위와 관계가 없습니다. 계명을 지켜 구원을 받고 계명을 지키지 못하면 구원 받을 수 없다는 행위구원, 율법종교는 훗날 만들어낸 왜곡된 구원관입니다.
어떻게 살까? 이런 명제는 구원을 위한 조건이 아니라 구원 받은 사람의 의무요 책임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살까? 십계명으로 정리해 주셨습니다. 그걸 한 단어로 줄이면 사랑!, 하나님사랑, 인간 사랑입니다. 사랑이 종교의 엑기스요 율법의 엑기스입니다. 온전한 사랑을 알고 실천하는 일은 선민(選民)들의 훌륭한 자질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대인은 십계명항목을 법대로 지킨다 하면서도 계명에 녹아있는 정신, 사랑의 의미를 놓쳐버렸습니다. 사랑은 하되 조건부 사랑입니다.
유대인사랑-동족의 사랑입니다.
의인 사랑-사랑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입니다.
익숙한 것들에 대한 사랑-익숙하지 않으면 경계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사랑하기 위해 미워하는 역설을 낳았습니다. 이방인에 대한 미움~ 죄인에 대한 정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의 진정한 의미가 아닙니다. 왜곡된 사랑, 이기적 사랑입니다.
왜 이렇게 된 것인가요? 하나님을 어떻게 믿을까? 에 너무 치중하다보니 이웃에 대한 관심과 책임이 소홀해 지고 끼리끼리, 니 편 내 편을 가르고, 내 편만을 사랑하기에 저 편을 미워해야 한다! 이게 선민 이스라엘의 실상이었습니다.
그렇게 이웃을 무시하면서 하나님을 경배한다 하니, 하나님께서 이런 백성들을 헐어버리신 것은 당연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백성은 이런 백성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백성들끼리 사랑하며 용서하며 잘 지내고⋯ 그래서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친(親)백성을 기대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혈통적 선민을 헤쳐 버리고 신앙고백의 새민족을 만들어 내시려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백중심의 새민족, 교회를 만드십니다. 교회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는 사람이지만 예수님의 보혈로 구원 받았기에 한 형제자매가 되고 동일한 성령이 함께 하심으로 같은 영의 가족이 된 것입니다. 그런 공동체에게 예수님께서 남기신 계명입니다.
34절, 새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서로 사랑하라“
새계명을 주노니⋯. 새계명은 옛계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옛계명이 유대인식 사랑의 방정식이라면 새계명은 십자가식 사랑의 방정식입니다.
유대인에게 사랑의 방정식은 대상은 정통파 유대인들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행위의인들입니다. 그들은 사랑 받을 조건과 자격을 갖춘 사람들입니다. 자기네들끼리는 사랑을 하고 내 편이 아니면 나처럼 안 한다고 정죄합니다. 사랑의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니 미워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사랑 방정식을 말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그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 희생적인 사랑, 모든 이들을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사랑입니다. 십자가 사랑은 죄인을 위해, 원수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면서 사랑하신 사랑입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1절,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가룟 유다. 2절, 이미 배신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그를 사랑해서 26절, 그에게 암시하잖아요? 이제라도 돌아서라고⋯ 제자들도 모두 배신했지만 다 용서하고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도 그런 사랑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새공동체는 그런 사랑을 해야 합니다.
21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참사랑을 보여주십니다. 베드로에게 양무리를 맡겼습니다.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헬라어 성경에는 ‘양’양(羊)이라는 세 단어가 각각 다르게 나옵니다. 물론 이런 단어들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해석도 있습니다.
첫 양, ‘아르니온’. 갓 태어난 양. 나보다 유치한 사람, 나보다 수준이 낮은 사람들입니다.
둘째 양, ‘프로바티온’. 성장 중에 있는 양. 청년기의 양. 나와 수준이 비슷한 사람들입니다.
세 번째 양, ‘프로바톤’. 늙은 양. 성장이 끝난 양. 나보다 수준이 높지만 생산성이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모등 양들을 생산성에 관계없이 다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어때요?
나보다 못한 아래의 사람은 경원시합니다. 부리려고 합니다.
수준이 비슷한 사람은 경쟁합니다. 사랑한다는 게 쉽지 않습니다.
위에 있는 사람은 나올 것이 없기에 불편해 합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다 사랑하라고 합니다.
레오나르드 다빈치의 <모나리자>는 세로 77cm, 가로 53cm의 그림입니다. 그럼에도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은 왜 <모나리자>만을 방탄유리로 보호할까요, 다빈치가 왜 많은 그림들 중에서 67세에 죽기까지 자기 옆에 두었는가요?
<모나리자>의 우수성은 여인의 알 듯 모를 듯 하는 신비스런 미소에 있지만 어느 각도에서 보더라도 시선이 마주친다는 것입니다. 다빈치는 이 그림을 그리려 열 번 이상 시체를 해부했다고 합니다. <모나리자>는 누구에게나 시선을 마주칩니다. 어느 쪽의 사람이든, 어느 위치에 있는 사람이든 눈을 마주쳐 줍니다. 그래서 유명한 그림이 된 것입니다.
우리들 사랑의 대상이 특별한 우정을 쌓는 사람들도 있지만 특히 교회에서 만나는 모두에게 미소를 보여주는 <모나리자>의 시선이 필요합니다. 미소만으로도 1급 신자가 돌 수 있습니다.
손도 발도 없는 사람이 석가모니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무엇으로 보시할 수 있습니까?”
“네 얼굴로 하거라. 얼굴로도 얼마든지 남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다.”
어떤 얼굴! 사랑의 미소를 띤 얼굴! 그러면 말하지요? 웃을 일이 있어야 웃지요! 그러면 웃지 못 할 일은 무엇이 그렇게 많아요? 하루 종일 웃지 못 할 일만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교회 안의 무심한 사람들, 미소가 없는 어른들, 딱딱하게 굳어가는 영국교회를 보며 소녀는 기도합니다.
“하나님, 나쁜 사람들은 착해지게 해주시고 착한(경건한) 사람들은 친절하게 해주세요.”
믿음이 좋으면 근엄한 얼굴을 해야 하나요? 교회가 친정집인데 왜 무서운 얼굴이 필요할까요? 그냥 웃어주는 미소만으로도 늘빛교회가 부흥되며 천국에서의 상급이 클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따뜻한 미소들이 늘빛교회를 천국을 맛보는 땅의 천국대리점이 될 줄 믿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서로 사랑하라고 하면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21장에서 주님은 친히 모델이 되셨습니다. 요한복음 배신자들이요 실패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먼저 찾아갑니다. 힘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성공자가 실패자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먼저 손 내미는 사람이 성숙된 사람입니다.
-자기희생으로 남의 필요를 채워줍니다. 자기를 희생하지 않고서는 사랑이라는 진주가 나오지 않습니다. 사랑의 3대 법칙이 있습니다,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견디기 힘들다.”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이기기 힘들다.”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하기 힘들다.”
그러기에 진정한 사랑은 자기를 희생할 때에 나타납니다.
-사랑은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고전 13장 “사랑은 오래 참는다”는, 기회를 준다는 것입니다.
-허물을 덮어주는 것, 그것도 위대한 사랑입니다.
-사랑은 용서하는 것입니다. 용서는 사나운 말로 공격하는 이들에게 부드러운 말로 대답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용서가 진정한 사랑입니다.
이게 가능합니까? 못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이라는 단서를 붙입니다. 이 구절은 단순히 능력 전도, 세계 선교를 뜻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랑의 힘을 말합니다. 성령을 받지 않으면 새계명의 핵심인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들, 공연히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 내 인생을 망치게 한 사람들, 어떻게 용서하며 거기다 사랑할 수 있습니까? 오직 성령이 임하면 가능합니다. 진정한 사랑과 용서는 맨 정신으로는 안 됩니다. 성령이 임해야 합니다. 성령이 없이는 그 사랑은 약합니다.
"인간은 죽을 때 사랑 받은 기억을 떠올리는 사람과 사랑한 기억을 떠올리는 사람이 있지. 난 반드시 사랑한 기억을 떠올리고 싶어"
영화 <샤오나라 이츠카>에 나오는 대사입니다. 남녀 간의 사랑은 아니더라도 진정한 사랑으로 내가 사랑했던 교회, 내가 사랑했던 목사님,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에 대한 추억으로 가야합니다. 어떻게 살까? 사랑하며 사는 것! 사랑하며 믿는 것! 그건 할 수 있잖아요?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 서로를 사랑하는 것! 익숙하지 않는 사람들에게서조차 따뜻한 시선을 보내는 것! 그것이 최고의 믿음이요 최고의 은사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 마지막 절(32절)에서,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그리고 나온 것이 13장 사랑장입니다. 13절⋯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니라!
사람은 누구를 기억합니까? 내가 사랑을 받았던 사람, 내가 사랑했던 사람을 기억합니다. 그의 업적을 기억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론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어떻게 믿을까에 대한 공부도 계속해야지만 어떻게 살아야 할까? 우리가 더 많이 고민하고 갈등하고 결단해야 합니다. 구원파는 구원 이후의 행위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세월호로 인해 그 아까운 생명들이 수장되고 유족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으면서도 교단 사수하기에, 돈 숨기기에 바빴습니다. 그리고, 유병언 교주는 국민들 앞에 나오지 못하고 도망 다니다 해골로 발견되었습니다. 살아생전 사이비교주로 사람들을 속이더니 죽을 때까지 어떻게 살까? 제대로 한 번 살아보지 못했습니다.
아서 윙 피네로는 말합니다.
"깊이 사랑하는 사람은 절대 늙지 않는다. 나이가 들면 결국 죽겠지만 젊게 죽는다"
그래요! 어떤 믿음으로 살까? 예수 사랑~ 예수 믿음으로 살아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믿음에서 진짜 예수 향기가 납니다. 목숨을 잃으면 천하를 잃는 것이지만 사랑을 잃으면 천국을 잃습니다!
바울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거론하며 사랑을 가장 먼저 앞세웁니다. 사랑은 나머지 8개 열매의 자양분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열매 목록 중에 가장 먼저 나옵니다. 8개의 열매들은 사랑으로 말미암아 성장합니다. 사랑의 열매가 없으면 다른 열매들도 맺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요 인격의 완성이요 믿음의 완성품입니다. 사랑에 성숙된 자는 신앙이 성숙된 자이고 세상이 그를 예수님의 제자로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로 한국교회가 채워질 때 대한민국은 다시 교회를 존경하고 복음화가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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