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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설교

[조직신학 설교63 종말론] 천국의 모습(요한계시록 21:9-27)

by 조직신학 교리설교 2023. 4. 18.

 

천국의 모습

요한계시록 21장 9-27절

 

 

서론

 

교우 여러분, 오늘은 조직신학 교리설교 마지막 설교입니다. 많이 힘드셨지요? 사실 저도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아름답고도 환상적인 천국 이야기로 마감을 하니 참 좋습니다.

 

오늘은 천국(天國)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만 제대로 된 팩트는 없습니다. 아무도 천국에 가 본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성경에 나온 수준으로만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내세의 미래에 대해 상당히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묘사합니다.

 

천국의 성벽에는 열 두 개의 문이 있습니다(21:12). 출구(出口)가 아니고, 입구(入口)입니다(21:25절 참조). 구원받은 사람들은 이 문을 통과하여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열 두 문은 열 두 지파를 상징하며, 이는 구신약 시대의 모든 택한 백성을 상징합니다. 이 문으로 들어가야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지 비밀 출입구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문이십니다. 천국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입구입니다. 그동안 세상에는 구원의 문을 자처하는 종교와 교주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천국의 문이 될 수 없고, 천국의 입구가 되지 못합니다. 천국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는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의 문이 되시고, 구원의 문이 되십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들은 천국의 주인이 되시는 예수님만을 통하여 천국에 입성할 수 있으며,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천국의 성곽(성벽 구조)은 벽옥으로 쌓여있습니다. 벽옥(碧玉)은 맑은 것을 의미합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깨끗하고 순전할 뿐만 아니라, 그 성은 정금인데 얼마나 순금인지 맑은 유리 같다고 했습니다(21:18절 참조).

이처럼 순수하고, 깨끗한 성에 사는 사람들 역시 금과 같은 신앙으로 무장된 성도들입니다(벧전 1:7). 여기에는 거짓말도, 미움도, 중상도, 시기도없습니다. 그야말로 어린아이들과 같은 순진무구한 사람들만 살아갑니다. 그러니 천국입니다.

 

하늘나라는 환경만 천국적인 상태라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살고 있는 존재들이 천국적인 마음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완전한 천국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천국의 성()을 떠받치고 있는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며졌는데, 보석 중에서도 최상의 것들입니다. 천국의 도시 기초가 최상의 보석으로 꾸며졌다는 것은 이 세상 나라와 비교하여 얼마나 아름답고 황홀한 도시인가를 보여줍니다.

 

천국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 길이라고 했습니다(21:21). 정금팔트(?) 입니다. 정금은 세상에서 가장 좋은 보화입니다. 그리고 가장 귀한 곳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은밀한 곳에 숨겨두거나 귀고리, 목걸이, 팔찌등에 사용됩니다. 값이 아주 비쌉니다. 천국에서는 정금의 평가가 아주 떨어집니다. 그것은 성()을 장식하는데 사용되는 게 아니라 도포 포장에 쓰이니 얼마나 흔하며, 그보다 더 좋은 영광들이 많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정금 길은 이 세상의 부귀영화가 천국에 가서는 아무 것도 아님을 보여줍니다. 세상에서 금을 대단하게 취급하며, 금관을 만들어 머리에 쓰고 최고의 영광을 나타내지만 천국에서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 발바닥에 밟히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하늘나라는 얼마나 굉장하며, 황홀할까요?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곳

 

이스라엘 백성들이 건축하였던 성전은 너무도 웅장하고, 아름다운 것이었습니다. 성전의 문들은 온갖 금() () 보화로 장식되었기에 햇살이 성전 문을 비추기라도 하면, 성전 자체는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성()으로 보였습니다. 그것은 세계에서 찾아볼 수 없는 최고의 영광이었고, 아름다움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왜 성전을 고안하셨고, 솔로몬에게 최고의 지혜를 주시면서까지 건축하도록 하셨을까요? 그것은 당신의 임재를 상징하는 거룩한 처소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하늘나라의 영광을 가시적으로 보여주고 싶으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눈에 드러난 그 영광은 하늘나라의 극히 작은 부분이기도 하겠지만, 이런 맛보기를 통해 죄와 고통으로 가득 찬 이 세상의 하나님 친() 백성들에게 안식과 소망을 주고 싶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전이 감당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천국에 가면 성전의 존재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곳은 거룩한 곳이요, 특별한 휴식과 소망이 필요 없는 곳입니다. 그곳은 안식 자체요, 소망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싸움, 시기, 상함등이 있는 이 세상에서의 성전도 나름대로 안식이었고, 도피성이었습니다. 그곳에 가면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 있었고, 죄 사함으로 오는 마음의 평안도 누릴 수 있었습니다.

 

현실적으로도 예루살렘 성()과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도피처요, 안전한 피난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기운으로 둘러싸였고, 보호를 받고 있기에 이방인의 군대가 감히 침공하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 성과 성전에 가 있으면 마음이 고요했고, 안심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에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평화와 평안이 완벽히 이루어지는 곳이기 때문이다. 상처투성이인 세상에서 그 상처를 싸매기 위해 늘 성전을 찾아오던 사람들이었지만 지금은 상처 자체가 없습니다. 적군의 공격으로 인한 두려움도, 공포도 없습니다. 그러니 성전에 찾아 나올 필요가 없습니다. 성전의 존재 이유가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성전은 자연스럽게 없어져 버립니다.

 

그 대신 하나님 자신이 성전이 되십니다. 그 옛날,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한 것이었으나, 지금은 임재 자체입니다. 그 앞에서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는 것이니 성전은 필요 없습니다. 성전이 필요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 통치의 완벽성만을 뜻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속죄의 제사가 필요 없게 되었다는 것이며, 기도, 중보를 통한 기도도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구속함 받은 친 백성들이고, 이제는 죄 없는 세상에 와 있고, 죄를 뉘우치며, 회개할 필요도 없는 곳이기에 성전의 의미는 더 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천국에 가면 우리 자신이 하나님을 모신 성전 자체가 됩니다. 바울은 우리 몸을 가리켜 하나님의 성전’(고전 3:16)이라고 새롭게 해석했습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그러나 세상에서의 우리는 죄가 있고, 오염되어 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완벽한 상태로 거하실 수 없으셨습니다.

천국에서는 우리의 심령이 눈처럼 희어진 상태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충실히 누리는 거룩한 상태이기에 우리 몸은 하나님이 완벽히 거하시는 성전이 되기에 더 이상 성전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영광과 기쁨이 있는 곳

 

천국을 보고 돌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성경이 알려주는 정도의 것만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성경은 그 시대에 맞을 정도의 수준으로 천국을 살짝살짝 보여주고 있습니다. 구약의 성경은 현세적이고, 물질화된 면이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상천국을 고대했기 때문입니다. 천국을 지상에 도래할 이상세계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수준에서 약간 높게 천국을 설명해 줄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신약시대에 펼쳐질 새로운 세상을 예언합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장차 메시아의 강림과 함께 도래하게 될 평화를 말해 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지상천국에서 펼쳐진 평화의 모습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사야 35:510을 요약하면, 광야에서 물이 솟겠다, 사막에 시내가 흐른다, 뜨거운 사막은 못으로 변한다, 메마른 땅은 푸른초장이 된다, 그 나라는 거룩한 시민들로 구성되어 있고, 짐승들도 사람들과 하나가 된다, 그렇게 되면, 영영한 희락과 기쁨과 즐거움이 있다,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라이게 장차 나타날 천국의 예고입니다.

 

이스라엘. 지리적으로 험한 곳에서 살아왔던 그들에게는 젖과 꿀이 흐르는 이 필요했고, 적군의 침공으로 하루도 편히 쉴 수 없었던 그들에게는 평화가 그리웠습니다. 샘이 흐르는 좋은 땅과 평과-그곳이 바로 천국일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들어와서 천국의 개념은 다르게 나타납니다. 구약의 천국이 지상에서 이루어질 평화의 나라라면, 신약의 천국은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계시는 천국 자체입니다. 그곳은 어떤 땅에 이루어질 천국이 아니라, 하나님이 통치하시고, 악이 전혀 없는 그야말로 거룩하고도 깨끗한 나라입니다.

 

요한계시록 21, 22장은 바로 천국장입니다. 그곳에서는, 눈물, 사망, 애증, 고통이 없다, 생명강과 생명나무가 있다, 목마르지 아니하고 지치지 않고 배고프지도 늙지도 않고 단조롭지도 않다, 우리 신체 역시 천국의 구조에 맞게 변화를 받아 신령한 영체(靈體)가 된다, 영체가 되기에 영원한 곳이다, 이곳에 있는 이들은 모두 거룩한 자들이기에 하나님의 거룩한 빛이 완벽하게 투영되고, 하나님의 속성이 100% 완전무결하게 전달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하나님의 신비한 성품을 누리게 된다이런 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인간의 세 단계

 

한 인간의 삶을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어머니 뱃속에서의 한 세상, 이 세상에서의 한 세상, 죽음 저편 천국에서의 한 세상. 세 종류의 세상을 인정하고 사는 사람들만이 삶이 무엇임을 제대로 인정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이 당연한 이치를 모든 사람들이 다 수용하면서 사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제1의 세상, 2의 세상까지만 인정하며 살아갑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요? 3의 세계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것을 인정하는 사람을 오히려 어리석다고 조롱합니다. 알지도, 확인할 수도 없는 미지의 세계에 대해 너무 많은 이생의 것들을 포기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라 조소를 보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에게는 그들이 오히려 안쓰럽고, 3의 세상을 위해 아무것도 준비해 놓지 않는 그들의 삶을 안쓰러워 할뿐입니다.

 

왜 그럴까요? 천국의 실재가 너무 확실하거늘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여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 너무도 미련하고, 그들의 종말이 어떠할지를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천국의 실재를 부인하는 일은 마치 태아가 엄마 뱃속 밖의 세계를 부정하는 어리석음과 꼭 같은 것입니다.

 

엄마와 태아 사이에 대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가정해 볼 때 엄마가 태아에게, “아가야, 엄마 뱃속보다 밖의 세상은 너무도 아름답단다. 거기에는 해님, 별님이 있고, 강이 있고, 물고기들이 있단다. 나무에는 맛있는 열매들이 가득 있단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럴 때 태아가, “그럴 리가 있나요?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요. 내게는 캄캄한 엄마 뱃속이 전부예요. 이 세상에서 살다가 죽으면 끝장이에요.” 라고 대답하며 다음의 내세-2의 세상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 태아는 지혜로운가요? 당연히 어리석습니다.

 

여러분들도 혹시 제3의 세상인 천국(天國)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가요? 3의 세상인 천국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곳이 있기에 이 세상의 모든 불공평도 감수할 수 있고, 악인들이 성공하고 의인들이 수난 당하는 이 어처구니없는 현실 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당했던 그리고 앞으로도 당할 그 수많은 고통들-이런 고통을 이겨내는 비결은 천국에 대한 소망입니다. 천국은 우리의 꿈이며, 안식이며, 위로이며, 영광입니다. 세상에서 고통이 있을 때에 천국을 바라보며 가장 좋은 것은 아직도 남아 있다. 천국에.” 하는 말로 용기를 얻어야 합니다.

 

결론

 

죤 뉴턴은 노예상인에서 회심을 하고 40여 년 동안 목사로 주님의 일을 하며 살았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로 믿었지만 지난 날 노예 상인이었다는 자책으로 괴로워했습니다. 그는 과거의 망령으로 괴로울 때마다 이사야 43 4절의 말씀으로 스스로를 위로했습니다.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노라.”

 

뉴턴은82세로 세상을 떠났는데 숨을 거두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지금 하나님 나라로 간다.그러나 내가 하나님 나라로 가면 아마 세 번 놀랄 것이다.

처음엔 하나님 나라에 오리라고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와 있는 것을 보고 놀라고

두 번째는 하나님 나라에 가면 반드시 만나리라 기대했던 사람이 안 보이는 것을 보고 놀라고

세 번째는 이처럼 거룩한 천국에 노예 상인인 내가 와 있다는 사실에 놀랄 것이다!"

 

우리를 이리 좋은 천국으로 데려가기 위해 주님이 오십니다. 분명코. 그때 우리는 그리웠던 모든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사도 요한처럼 손을 높이 들고 큰 소리로 외칩시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요한계시록 22:21)

 

우리는 지금까지 기독교교리 전반을 공부했습니다. 성경교리들이 깨달아지고 이해가 되고 믿어지는 역사가 있기를 기대합니다. 그래서 흔들리지 않는 구원으로 더욱 주님 앞으로 성장해 나가시고 이단들의 유혹에 빠지지 않는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