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속성(屬性)
베드로전서 1장 1-2절
서론
한국교회는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성공한 기독교입니다. 유럽으로 들어간 기독교는 가는 곳마다 성공적으로 정착했고 기독교국가가 되었습니다. 유교, 불교, 특별한 샤머니즘 종교가 없었기에 십자가를 앞세우는 강력한 종교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시아는 다릅니다. 유교와 불교, 샤머니즘이 토착화가 되었기에 기독교는 배척과 탄압의 대상이었습니다.
일본은 우리보다 훨씬 먼저 기독교가 들어갔지만 지금 1억 2천만의 인구에 기독교인수는 50만 명 남짓에 불과합니다. 중국에서도 기독교는 힘을 쓰지 못했고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어느 곳에서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한국은 다릅니다. 한국기독교는 선교 150년을 바라보는 지금, 세계교회가 주목할 만한 대성장을 거듭해 왔습니다. 세계 50대 교회 중에 한국교회가 23개 들어 있을 정도로 한국교회의 성장은 기적 그 자체였습니다. 물론 20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장로 대통령이 네 명이나 나올 정도입니다. 언젠가는 장로 대통령에 총리는 안수집사, 국회의장도 안수집사였을 정도입니다. 그만큼 한국기독교는 한국 사회에 중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선교역사에 대성공입니다.
하지만 열심도 많고, 은사도 많고 인물도 많아서 부흥이 빨랐는데 너도나도 모이다 보니 그에 따른 어두운 면도 있었습니다. 어느 목사님의 희생적 이야기가 언론에 나오는가 하면 다음 날에는 목사가 부동산을 갈취하여 도주했다는 기사가 나옵니다. 한 교인이 장한 일을 하고, TV에 나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다른 화면에서는 어느 집사가 사기를 쳐서 도망갔다는 보도로 교회를 부끄럽게 만듭니다.
교회는 왜 이런 양면성의 모습을 보일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알곡신자와 가라지신자가 한 교회에 공존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거룩한 성역(聖域)으로 존경과 함께, 위선자 양성공장이라는 비난도 동시에 받습니다. 이런 공존성이 있기에, 앞으로도 교회는 계속적으로 존경과 비난을 같이 받으며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교회의 양면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교회의 세속화된 모습에 실망해서 무교회주의, 가나안교인, 영상예배신자로 빠지게 됩니다. 그러기에 교회의 추한 모습에 낙심하지 않으려면 교회의 속성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유형교회와 무형교회
교회는 유형교회와 무형교회로 분류합니다. 유형교회(有形敎會)는 말 그대로 ‘눈에 보이는 교회’로, 1절에 본도를 비롯해서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 비두니아(본도의 또 다른 이름)... 등 소아시아에 위치한 다섯 교회들처럼 교회를 이루고 교회에 등록하고, 출석하는 모든 교인으로 구성됩니다. 알곡신자와 가라지신자가 섞이고, 조직이 있고, 정규적인 집회 시간, 모임 장소가 있습니다. 유형교회의 교인이 되는 데는 아무런 자격이나 조건이 없습니다. 교회만 나오면 교인이 됩니다.
그만큼 유형교회는 중생자와 비(非)중생자가 함께 섞입니다. 가룟 유다.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도 형식적으로는 제자요 교인이었습니다. 이들은 참 신앙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고, 종교적 신자들에 불과하나 엄연히 유형교회에 등록된 교인이기에 이들로 인해 파생되는 잘못에 대해서는 교회가 몽땅 비난을 떠안게 됩니다.
로마가톨릭은 유형교회를 상당히 중요시 여깁니다. 천주교가 말하는 교회는 조직과 건물과 그에 소속된 교인들로 이루어져 있고, 조직의 총수는 교황입니다. 그래서 “천주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말로 유형교회에서 떠나가면 구원이 없는 것처럼 단죄해 버립니다. 그래서 로마가톨릭은 이단이나 분파들이 거의 없습니다. 유형교회에서 단죄당할까 겁을 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유형교회도 중요시하나, 전우주적 참 신자들의 모임인 무형교회를 더 중요시합니다.
무형교회(無形敎會)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신령한 교회로 구원받은 참 백성들로만 구성됩니다. 그들은 2절,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받은 자들이요, 그 일을 위해 선택함을 받은자들입니다. 세례를 받고 중직역할을 감당하지만 이 교회의 회원이 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무형교회는 눈에 보이지 않기에 건물이나 조직이 아닙니다. 참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主)로 영접하여 중생한 사람만 일원이 됩니다. 무형교회는 시대와 공간과 교파(이단은 제외)를 뛰어 넘어 하나님이 택하고 인치신, 구원받은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을 다 포함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영적인 면과 지상적이라는, 양면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거하시는 성전이요, 그리스도의 신령한 몸으로서의 천국생활의 예표이지만 엄연히 땅에 속해 있기에 세상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불택자들이 교회를 출입하고, 중생치 못한 자들이 교회 직분자가 되며, 지도자의 위치(목사, 장로 등)에 오르게 도 됩니다. 이들이 어느 순간 불신적인 모습을 노출시킬 때, 교인들은 실망하며 교회는 비난을 받게 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마저 교회를 비난하시며, 마음을 돌려버리실까? 그것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당신의 교회가 죄악으로 물들여진 오물통과 같다 해도 교회의 죄악은 혐오하면서도 교회는 끌어안으십니다. 교회가 당신의 백성되심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십니다(히11:16)
하나님은 단 한 번도 자기의 교회를 포기하신 적이 없습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독생자의 피로 구속하시고 세우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중세교회가 죄로 얼룩이었으나(얼룩질 정도가 아니라 온통 죄의 암흑천지였다!) 하나님은 교회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루터를 비롯한 개혁자들을 일으켜서 중세교회를 정화(淨化)시키셨습니다. 개혁가들은 당신 자신의 교회를 깨끗케 하시려는 하나님의 빗자루들이었으며 대걸레들이었습니다.
교회의 세 가지 속성
사도신경은 교회를 ‘거룩한 공회’라고 말합니다. 교회는 하나님께 속한 예배공동체이고,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기에, 사도신경은 교회를 ‘거룩한 공회’라 부른 것입니다. 한글번역은 단순히 ‘거룩한 공회’이지만, 영어에는 ‘하나의 거룩한 공동교회’(One Holy Catholic Church)로 나와 있습니다. ‘성도들의 무리들’입니다. ‘공회‘가 가톨릭교회(Catholic Church)라는 말이 되었고, 그것을 로마교황청이 교단 명칭으로 만들어 버렸기에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매우 껄끄러운 용어가 되어 버렸으나 원래 ‘공회’는 ‘구원을 받은 성도들의 무리’라는 좋은 의미입니다. 남한에서는 절친한 친구 사이가 ‘동무’이나 북한에서는 이 말을 누구에게나, 경계의 뜻이기에 남한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 이치와 같습니다.
로마교황청은 ‘가톨릭’이라는 말을 자기들의 교리에 맞게 잘못 해석하여 남용합니다. 사도들이 모여 사도신경을 제정할 때, ‘공회’라는 말은 교황청이 주장하는 것처럼 교인들 앞에 군림하려는 종교지도자들의 ‘조직’, ‘종교체제’, ‘권위’가 아닙니다. 교황청은 ‘공회’를 교회 자체의 속성이나 신자들에게 해당되는 의미로 보지 않고 교황을 중심으로 한 종교체제를 주장합니다. 교황청 자체가 ‘거룩한 공회’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감히 ‘거룩한 공회’에 도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 발전되어 중세 교회의 암흑기를 만들어 내었습니다.
거룩한 공회라는 용어에는 세 가지 속성(특성)이 있습니다.
우선, 통일성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되기를 원하지만, 사단은 교회분열을 원합니다. 교회를 파괴시키려는 사단에게는 박해(외부적 공격)와 분열(내부적 교란)이라는 공격 무기가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분열하고, 원수를 만들고 외면하면 사단은 기뻐하나 하나되게 하시는 성령은 탄식하십니다. 교회를 분열시키는 사단의 대리자 역할에 나도 모르게 충실한가, 교회를 일치시키는 성령의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있는가, 여기에 따라 참교인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지시기 전, 요한복음 17장의 대제사장의 기도에서 하나됨을 기도합니다.
21절,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22절,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23절,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하나님과 사람이… 사람들과 사람이… 하나되게 하심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인간들 사이에 막힌 담을 헐어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머리로 하는 몸된 교회는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가 되기 위해 서로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교회 안수집사이며 유명한 정치평론가 박성민 집사님은 문화일보 칼럼에서 “정치란, ‘열중에서 아홉 개가 다르더라도 하나가 같으면 동지’라 생각하는 영역”이라 했습니다. 사실 이건 정치의 영역이면서도 우리 기독교 복음의 영역입니다. 교회는 일치, 통일성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기독교의 분파와 분열은 좋은 일은 아닙니다. 성경을 이해하는 해석과 이해가 다를 수 있기에 교파가 생겨날 수 있습니다. 개인의 명예나 이기심 때문에 교파가 나뉘는 것은 사단의 역사이지만 성경 해석 차이로 나뉘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자유의지를 활용하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교파와 교단이 달라도 명백한 이단이 아니면 서로의 입장을 수용, 서로의 교리를 양해해 주어야 합니다.
정통파 교단들은 각각의 좋은 점들, 본받아야 할 점들이 있습니다. 미국에서 교파의 장점을 말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진실한 생활은 감리교인에게서 배워라”
“체험적 신앙은 침례교가 좋고, 교회 충성은 루터교인들이 대단하다”
“교인의 긍지는 성공회 교인이다.”(성공회는 영국 국교회다, 귀족적인 냄새가 난다)
“단순한 믿음은 퀘이커교도이고, 봉사생활은 구세군이다.”
“기쁨에 찬 신앙은 흑인교인들에게서 배우고” “기도생활은 장로교인들에게서 배우자”
교단의 차이는 구원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이단이 아니면 어느 교회를 다녀도 구원을 받습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로 받는 것이지 교파나 교단의 장정이나 교리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에는 장로교인도, 감리교인도, 침례교인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기에 교회는 한 하나님 한 예수 그리스도, 한 성령, 한 성경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기에 전우주적 교회가 통일성이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두 번째 속성은 거룩성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에 깨끗해서 부르신 것이 아니라 깨끗한 목표를 향하도록 불렀습니다. 거룩했기 때문이 아니라 거룩해지라고 부름 받은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과거의 삶이 어찌되었든지 하나님은 현재 거룩해지라고 명령하고 계시며, 교회를 향하여 성전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의 신부로서 거룩한 순결을 기대하십니다. 그럼에도 오늘날의 교회는 누더기를 걸친 신데렐라가 되어버린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이스라엘 교회가 되는 총회에,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레19:2) 명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거룩해지는 것을 항상 희망하고 계십니다. 이 일을 위해 2절, 성령께서 교회 안에서 날마다 거룩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완전히 거룩해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결코 완벽한 거룩에 도달할 수 없고 서로 간에 완벽한 것을 요구해서도 안 됩니다.
강단의 지도자들에게서, 매일 만나는 성도에게서 완전한 거룩을 기대하지도 말고, 실망도 마세요. 교회의 구성원들은 거룩한 자들이 아니라 거룩을 향하여 나아가는 과정 중에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자신에게는 철저해야 하고, 남에게는 관대해야 합니다.
원로목사가 후배목사에게 충고를 합니다.
“교회서는 큰일을 작게 만들고 작은 것은 없는 것으로 만들라. 그래야 교회가 평안해진다.”
그래요! 교회는 헤집고 까발리는 곳이 아니라 사랑으로 덮어주며, 축소해 주는 곳입니다. 안 좋은 소문은 차단시키고, 좋은 소문은 퍼져나가게 해야 합니다. 부정적인 사람들은 언제나 교회의 잘못된 점을 찾아내려고 합니다. 교회는 완벽한 의인들의 모임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죄인들’의 모임입니다. 그런 구성원들로 교회는 늘 죄가 흐를 수 있습니다. 이런 속성을 무시하고 완전한 교회만을 주장하며, 교회를 비판하려 한다면 이것은 오만일 뿐입니다.
유진 피터슨은 ‘메시지’ 성경에서 교회를 이렇게 두둔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에 모이면, 머지않아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밖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이런 결론을 내린다. “종교 사업에는 사업 빼고는 아무것도 없군. 게다가 부정직하기까지 하다니.” 그러나 안에 있는 사람들의 시각은 다르다. 병원이 환자들을 한 지붕 아래 모아서 이러저러한 환자로 분류하듯이, 교회도 죄인들을 불러 모은다. 병원 밖에 있는 사람들 또한 병원 안에 있는 사람들만큼 아프기는 매한가지다. 다만, 그들의 질환이 아직 진단되지 않았거나 감추어져 있을 뿐이다. 교회 밖에 있는 죄인들의 사정도 마찬가지다. 일반적으로 교회는 선한 행실로 넘쳐나는 이상적인 공동체가 아니다. 오히려 교회는 인간의 나쁜 행실을 공개적으로 드러내 놓고, 직면해서 처리하는 곳이다.”
교회는 적어도 자신들의 죄를 시인하고 고백하며 용서를 구합니다. 그러기에 희망이 있습니다. 환자들을 모아서 건강한 사람으로 치료해 주는 곳이 교회입니다. 웰즈의 말입니다.
“완전한 교회를 찾지 마라. 이 땅에서는 찾을 수 없을 뿐더러 설령 찾아낸다 하여도 당신은 그 교회의 교인이 될 자격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가 지상에 있는 한, 죄악과 부패로 고통을 당합니다. 구원의 방주에도 정결한 동물과 부정한 동물이 섞여 있었습니다. 그래도 방주가 구원의 사명을 감당한 것처럼 교회도 죄로 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지키시며, 죄를 다스림으로써 거룩으로 나가게 하시며 결국은 그리스도의 신부가 됩니다. 그러기에 한국교회를 비난하기 전에 내 자신의 성전을, 마음을 깨끗하게 씻어야 합니다. 그래야 한국교회는 정화되어 나가면서 거룩한 성소가 될 것입니다.
교회의 속성 세 번째는 보편성입니다.
보편성(普遍性)은 ‘모든 것에 두루 미치거나 통하는 성질’입니다. 일반적인 특성으로, 반대어가 특별성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나가 된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은 나라가 다르고 피부와 색깔이 다르고, 교단이 달라도 한 가족입니다. 우리 교인이 내 아버지요, 어머니요, 형님이요, 누이요, 동생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눅3:35). 이것이 교회가 갖고 있는 속성 보편성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졌다면 육신의 형제 이상으로 교회 가족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한 모든 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이 되었다는 이 사실을 명심할 때에 더 조심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고, 마음으로 교제를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초대교회가 단시간에 큰 화제를 일으키며 마음을 사로잡게 된 것은 보편성, 평등성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계급장을 떼고 모두가 형제요 자매였습니다.
한국교회도 선교 초기에 보편성, 평등성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갔습니다. 한국교회의 최초의 장로는 백정출신인 승동교회의 박성춘 장로입니다. 선교사에게 병을 고침 받고 믿음을 가졌습니다. 백정출신이 장로가 되다니, 천지가 개벽할 노릇입니다. 아들 박서양은 세브란스의전의 1회 졸업생이며 한국인 첫 외과의사입니다. 그가 교수를 하자 양반집 자제 몇이 건방을 떨며 백정의 아들이라 무시했습니다. 그 말에 박서양은 “내 속에 흐르고 있는 500년 백정의 피를 보지 말고 과학의 피를 보라”며 꾸짖었습니다.
김제 금산교회도 주인과 머슴이 장로 후보로 나왔는데 머슴이 당선되었습니다. 그때 주인 집사가 “여러분 아주 잘했습니다. 나보다 이자익 집사님 믿음이 좋습니다!” 라는 말로 교회가 분열됨을 미연에 막았습니다. 한국기독교의 대성공은 그냥 된 것이 아닙니다. 이런 교회의 보편성이 당시 조선인들에게는 대안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늘 우리 교회의 현실은 어떤가요? 교회를 세속적인 그룹의 하나로, 심지어는 회사 정도로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요! 그런 생각이라면 교인 안에서 믿음의 한 형제라는 의식보다는 경쟁자 의식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직분을 탐내고, 주님을 위한 헌신보다는 내가 어떤 직분을 맡게 되는가에 더 관심을 갖게 되고 그걸 목사의 신임으로 착각합니다. 교회가 경쟁체제가 되고 직분 상승의 욕심이 교회를 세속화시켜 버립니다.
교회의 모든 사람들을 한 가족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모든 이들에 대해 마음을 열고, 모든 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 되고 기도하는 집이 되고 하나님의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의 본질적인 성격을 파악하고 더 나은 교회를 만들어 가기 위해 힘을 합쳐야 할 것입니다.
결론
어거스틴은 말합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이기 때문에 결코 부패하지 않는다. 부패한 인간들이 있을 뿐이다.”
부패한 인간들의 일부는 변화되고 부패한 인간들의 일부는 죽어서 교회를 떠납니다. 그러면 주님의 몸 된 교회는 그만큼 정화가 됩니다. 그래서 교회는 부패와 타락으로 자신을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마치 바다가 오염물질을 받아들이지만 계속 소금물로 정화하고 망망한 바다에서 희석하고 산화(酸化)하면서 깨끗한 바다를 유지하듯이 지난 2천년의 교회가 그렇게 부침(浮沈)을 계속해 왔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시기에 하나님께서 지켜내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구원선으로서 충분히 그 역할을 감당해 왔습니다. 교회를 통하여 그런 사역을 오늘도 감당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시오 우리 늘빛교회의 하나님이 되시는 줄 믿습니다! 오늘도 교회를 바로 세워나가시는 우리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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