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으로 아는 예수 그리스도
마태복음 16장 13~17절
서론
아무개대학교수의 외동딸이 아프리카 선교사를 지망했습니다. 지금에야 지구촌은 한 지붕이라고 하지만… 어디 가서도 화상통화가 가능하지만 50년 저쪽에서야 다시 만남을 기약할 수가 없는 생이별입니다. 아버지 교수가 아무리 달래고 얼러보아도 딸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아프리카로 떠나는 딸을 부두에서 배웅하고 돌아서면서 '비신자'('불신자'라는 말은 '비신자'로 사용했으면 좋겠습니다.) 아버지는 중얼거렸습니다.
“예수여! 당신은 누구십니까? 내 딸을 아버지보다 더 사랑하게 만드는 당신은… 신이십니까, 사람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예수가 어떤 분이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삶을 의탁하고, 본 적도 없는 2천 년 전의 예수를 위해 시간도 물질도 심지어는 목숨도 맡겨버릴까요? 불교도 순교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성불을 위해 있는 것이지 석가를 위해 생명을 내놓는 것은 아닙니다. 석가모니가 빠져도, 교훈만 있으면 불교는 가능합니다. 공자가 실재적인 인물이지만 설령 현존하지 않았던 전설의 인물이라 해도 공자의 교훈만 있으면 유교는 존립이 가능합니다.
그러기에 자기 신념을 위해서는 죽어도 공자를 위해서는 순교하지 않습니다. 이슬람도 무함마드를 위해 순교하는 것이 아니라 이슬람 세력의 확장과 천국에서 누릴 자신들의 영화를 위해 이슬람테러리스트들이 성전이라는 미명 하에 순교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다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남기신 교훈을 좋아하고 교훈대로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참 하나님, 참 사람이 아니시라면 기독교의 모든 교훈과 교리는 그 날로부터 사라져 버립니다.
기독교는 교훈에 근거를 둔 종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생애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주님의 교훈보다도 주님의 생애에 더 집착합니다. 주님의 동정녀 탄생, 십자가의 죽으심, 부활, 승천과 재림 등을 더 중요시합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말씀이나 교훈보다는 주님께서 하신 일에 대해 더 관심이 많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는, 예수님은 (나에게) 누구신가? 예수님의 인격을 믿는 것입니다.
둘째는, 예수님께서는 (나를 위해) 무슨 일을 하셨나?" 예수님의 사역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가이사랴 빌립보는 갈릴리바다에서 동북쪽으로 약 40킬(우리교회에서 영종도까지. 구체적으로 이리 알려주면 이해가 빠릅니다.)로 가량 떨어져 있는 지방입니다. 주민들은 유대인이 아니기에 다른 지방에서처럼 예수님을 열렬히 쫓아다니는 극성분자들이 드물었습니다. 그 동안 많은 군중들에게 시달리던 예수님께서는 12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조용한 시간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지상 생활은 대략 1개월 반쯤 남았습니다(신학자 벵겔).
‘제자들은 나의 실체를 이해하는 사람이 있는가… 나의 지상 사역을 이해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만일, 3년 동안 있었으면서도 예수님에 관한 진리를 파악한 사람이 없다든지, 복음에 대하여 어느 정도라도 이해한 사람이 없다면, 3년 수고는 헛것입니다. 예수님의 본질에 대해 파악한 극소수 제자라도 있다면 그의 천국 사업은 희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스승인 자기를 어떤 사람으로 믿고 있는지 질문합니다.
13절,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제자들이 전달하는 정보에서 당시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관점을 볼 수 있습니다.
“(깡단?이 있는) 세례 요한이다!” 라는 이들은 예수를 해방자로 보았습니다. 헤롯왕 역시 예수를 요한의 화신으로 여긴 적이 있습니다(마14:2).
“(능력의) 엘리야다!”라는 사람은 예수님을 능력자로 받았습니다. 엘리야와 같은 능력으로 로마정부를 몰아세우고,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리라는 기대 속에서 쫓아다녔습니다.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다!” 라는 사람들은, 사탄의 속박에 빠져있는 죄인을 민망해 여기시는 예수에게서 애국적 모습을 발견하고 그런 소문이 떠돌았겠지요. 이외에도 선지자 중의 하나, 모세와 이사야로 보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좋은 정보입니다.
제자들이 자기들 입으로는 말할 수 없을 혹평도 많았습니다. ‘귀신들린 사람’,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 즐기는 사람’, ‘세리와 죄인의 친구’, ‘목수의 아들’… 등등입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에 대한 이해는 다양합니다. 해방자, 노동자, 사회사업가, 마술사, 민족주의자… 한 인간에 대한 이해가 이처럼 상이한 경우는 어떤 위인도, 성현에게도 없습니다. 이런 다양한 이해는 자기들 렌즈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사람의 렌즈가 아닌 성경의 렌즈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를 바로 알고 만나야 합니다!
이름을 통한 예수 알기
‘하나님은 누구신가?’라는 초창기 설교에서 하나님께서는 호칭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신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하나님의 본명은 ‘여호와’입니다(출3:14). 나는 스스로 있는 자…, 한 단어로 하나님을 충분히 계시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명칭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가를 충분히 알 수 있게 하셨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에게 사용된 이름들이 많습니다. 그 이름들은 저마다의 의미들을 내포합니다.
어떤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냐?’는 본질적인 존재를 나타내 주고 있고, 어떤 이름들은 그의 속성(성질)들을 말합니다. 그의 상태, 직책을 표시해 주는 이름도 있습니다.
이제 몇 가지의 호칭들을 통하여 이 사실을 확인해 보도록 합시다.
[예수]
‘예수’는 예수님을 칭하는 가장 흔한 이름으로 개인적이고, 사적인 이름, 즉 집에서 부모가 쉽게 부르는 이름입니다. ‘예수’는 히브리어 ‘여호수아’의 아람어 변형어(語)입니다. ‘여호수아’는 포로 후에는 ‘예수아’가 되었다가 점차 변형되어 끝의 ‘아’자가 빠지고 ‘예수’로 정착됩니다.
구약에는 유명한 두 여호수아가 있습니다.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모세의 후계자입니다. 당시 유대 어린이들 중에는 예수라는 이름이 많았답니다. 나사렛만 해도 몇 명이 있었다는군요. 히브리 부모들은 조상들을 가나안 땅에 입성시킨 민족 영웅 여호수아를 흠모하여 자녀들에게 붙여주었습니다. 여호수아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부모의 마음입니다.
두 번째 ‘여호사닥의 아들’ 여호수아가 있는데 백성의 죄를 짊어진 대제사장입니다(슥3:1이하).
‘예수’라는 이름은, 하나님께서 직접 작명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라는 이름을 통해 성자 하나님께서 성육하신 목적을 계시하십니다. 예수의 이름은,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마1:21)는 뜻으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오시는 구세주, 구원자임을 밝혀주셨습니다. 아울러 백성들의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께 기도하러 나가던 대제사장임을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이름을 통하여 예수는 누구이며 그의 사역이 무엇인가를 계시합니다.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으로 구약의 메시아(Messiah)와 같은 말입니다. 구약에 기름부음을 받아 직무를 수행한 사람은 왕, 제사장, 선지자입니다. 그들은 정규적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출29:7, 레4:3). 왕은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로 불리기도 했습니다(삼상 24:6). 기름부음을 받는다(注油)는 것은 세 가지 요소를 내포합니다.
-성별된 직위에 임명되었다!
-기름부음 받은 자와 하나님 사이에 신성한 관계가 성립되었다!
-성별된 인물에게 성령이 임하셨다(삼상 10:1, 6).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 전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메시아직으로 임명되었으나, 지상 생애에서는 성령으로 잉태되었을 때(눅1:35),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에 성령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만백성을 구원하러 오신 구세주인 것이며, 공적인 그의 직무를 상징하는 이름입니다. 안드레는 형에게 예수님을 ‘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 소개하고 있으며(요1:41), 수가성 여인 역시도 “내가 그리스도를 만났다”(요4:29)고 했습니다.
[인자(人子)]
예수님께서 가장 자주 사용하던 것으로 40회 이상 나옵니다. 이 명칭은 예수님의 인성(人性)을 나타내 주는 것이나 그의 초인간적인 특성, 영광 가운데 재림하시는 신격(神格) 인물임을 강조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인자’에는 구세주임이 함의되고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은 ‘인자’라는 이름을 좋아하셨습니다. ‘인자’라는 이름은 메시야성(性)을 은폐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라는 의미를 잘 몰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름은 구신약에서 55회나 사용됩니다. 한 민족으로서 이스라엘에게 붙여진 이름으로(출4:22, 호11:1), 다윗의 집에 약속된 왕에게(삼하 7:14) 천사들(욥1:6), 경건한 사람들에게도 적용되었습니다(창6:2).
신약에서 예수님은 이 명칭을 사용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물론 귀신들까지도 가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름으로 불렀습니다(눅 4:41).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칭에는 삼위일체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
래서 주님께서도 “나와 하나님은 하나니라!”(요10:30)고 하셨습니다.
이 말에 유대인들은 펄쩍 뛰었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하나님과 동등된 신분으로 될 수 있느냐!’ 참람한 죄인이라고 펄펄 뛰는 유대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적 시각이 아니면 유대인들처럼 오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내가 하나님이다! 한다면 누가 쉽게 믿을 수 있습니까? 조희성을 하나님으로 믿었던 영생교도들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주(Lord)]
“주님”, “주여”-성경에는 흔한 이름으로 몇 가지의 경우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선생님’. 유대인들은 단순히 정중하고 존경하는 인사의 형식으로 “주”라고 호칭했습니다(마 8:2). 영어의 선생님(sir)과 같은 의미입니다.
‘주인’. 소유권과 권위를 포함합니다. 나의 소유자로서의 주인, 바로 그 주인에게 붙이는 이름이 ‘주’입니다. 황제는 신민들의 주인이기에 큐리어스, ‘주’라는 칭호를 붙였습니다.
‘하나님’. 예수님에게 진지한 마음으로 “당신은 나의 주님이십니다!” 할 때는 하나님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관계될 때의 ‘주’(主)는 ‘하나님’입니다. 특히 이 명칭이 예수님께서 부활한 이후에는 교회의 소유주요 통치자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제 앞에서 이야기하던 배경으로 돌아갑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통하여 자신에 대한 군중들의 생각을 아셨습니다. ‘그렇군!’하는 모습을 보이던 예수님은 느닷없이 물으셨습니다. 빌립보 언덕에는 거대한 황제 신전이 있었는데, 황제신전을 배경으로 묻는 것입니다.
“그러면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에게는 기습적인 질문이었지만 예수님은 처음부터 바로 그 질문을 염두에 두셨습니다. 주님에게는 세상의 예수관은 상관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모르기에 다양한 답이 나오고 자신들의 정보와 그 정보를 이해하는 입장에 따라 예수님을 해석할 것입니다. 그러니 시중에 떠도는 다양한 예수관이 나오겠지요.
제자들에게는 다릅니다. 그들은 3년을 수학했습니다. 먹고 자고 생활하면서… 학습을 했으니 정확한 예수관이 나와야 하지 않을까요?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해서 대답합니다. 먼저, 베드로는 스승을 "주는..."이라 호칭합니다. '주'는 헬라어로 '큐리어스'인데 황제라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황제숭배가 만연한 시대에 황제신전을 앞에 두고 진정한 황제, 유일한 왕은 예수님 외에는 없다 고백합니다. 이는, 데살로니가에서 바울이 고소당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야손이 그들을 맞아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행17:7).
당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로마 황제 가이사 숭배를 거절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섬긴다는 의미입니다. 그건 황명을 거절하는 일이기에 목숨을 건 고백입니다.
베드로는 걸고 예수님을 '큐리어스'로 고백하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마16:16).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100점짜리 대답입니다. 스승께서 대(大)칭찬을 하셨으니까요! 네 대답은, 혈육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대답이라는 것입니다(17절). 그러니 100점입니다.
베드로의 대답에는 두 가지 중요한 개념이 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주님은 메시야, 즉 구세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입니다”-이 말은,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삼위일체의 성자(聖子) 하나님임을 염두에 둔 대답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에 대한 가장 정확한 답입니다. 이 답을 갖고 있어야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확실하게 아는 것이고 구원을 받는 믿음입니다.
결론
어느 분이 식당에 들어갔는데 지저분하고 형편없는 음식점이었습니다. 그날로 그 식당에 발을 끊었습니다. 한참 후에 그 식당이 좋아졌다는 입소문이 돌아 다시 가 보았습니다. 식당 안이 깨끗하고 맛도 좋아서 종업원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지난번에는 형편없었는데 왜 이리 달라졌느냐?”
종업원의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주인이 바뀌었어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는 새로운 주인을 모신 존재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 내 죄를 사해주시는 구세주로 모셨나요? '큐리어스' 주님-내 마음의 '큐리어스' 주인으로 모셨나요? 제대로 모셨다면 우리는 달라지고 있습니다. 내가 모르지만 분명 달라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큐리어스' 내 인생의 왕! 주인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교리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직신학 설교31 기독론]비하(卑下)의 신분 (빌립보서 2:5~8) (0) | 2023.02.16 |
---|---|
[조직신학 설교30 기독론] 그리스도의 인성(人性)(히브리서 4:14~16) (1) | 2023.02.16 |
[조직신학 설교29 기독론] 예수님의 신성(神性) (요한복음 14:8~11) (0) | 2023.02.10 |
[조직신학 설교27 인간론]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다!(골로새서 3:5~11) (0) | 2023.02.09 |
[조직신학 설교26 인간론] 은혜 언약 안의 인간(로마서 5:12-21) (0) | 2023.02.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