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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설교

믿음 바로 세우기(1) - 믿음의 동기(베드로전서 1:8, 9)

by 조직신학 교리설교 2023. 5. 3.

 

 

믿음 바로 세우기(1) - 믿음의 동기

베드로전서 1장 8, 9절

 

 

서론

 

오늘은 첫 시간, 왜 믿는가? 믿음의 동기와 목적입니다.

(2017년 설교) 10년마다 통계청이 실시하는 종교분포조사에 따르면, 종교인은 43.9%, 무종교인 56.1%였습니다. 처음으로 무종교가 종교 인구를 앞섰습니다. ‘종교가 없다는 답변자 중 20대 비율(64.9%)이 가장 높았습니다. 100명 중 65명이 무종교입니다. 10(62%)가 바로 뒤를 이었습니다.

 

종교 인구는 왜 갈수록 줄어들고 있을까요? 먹고 살만 하니 사람들이 종교를 떠납니다. 국민소득이 1만 불 이하, 사는 것이 힘들 때 종교를 많이 의지합니다. 1만 불~2만 불 정도가 되면 먹는 문제는 해결됩니다. 사는 것이 당장 급하지 않으니 하나님을 덜 찾게 됩니다. 3만 불을 넘어서면 세상이 천국입니다. 그래서 종교를 떠납니다. 국민소득이 높은 유럽의 기독교국가들이 신앙을 버립니다. 기독교국가라지만 무늬만 기독교인들이 태반입니다. 

 

청교도국가 미국도 10년마다 마음에 가는 종교가 없다는 비율이 두 배, 심지어는 세 배씩 늘고 있습니다. 이제 종교는 집안의 승계가 아니라 개인의 선택사항이 되어버렸습니다.

 

왜 세상이 종교를 버릴까요? 영국을 중심으로 일어난 진화론과 무신론이 만들어 내는 현상입니다. <만들어진 신>의 리처드 도킨스, <종교의 종말>의 샘 해리스, <신은 위대하지 않다>의 크리스토퍼 히친스, <우주에는 신이 없다>의 데이비드 밀스 이들 무신론자들은 종교가 인류에게 해롭고 불필요하기에 반드시 없애야 한다는 종교해악론, 종교말살론을 주장합니다. 자유롭고 개방적인 젊은이들이 이들 소리에 공감하면서 아래세대가 종교를 버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장차 종교는 인류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종교의 종말을 말합니다.

 

물론 그전에도 무신론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대표적인 무신론자가 독일철학자 프레드릭 니체입니다. 그는 무신론 이전에 내가 하나님을 죽였다!” 사신(死神)철학을 외쳤습니다. 여기에 동조해서 사신신학까지 나왔습니다. 그러나 대중화는 시키지 못했습니다. 그의 가르침이 너무 깊었고 황당했기에 대중들에게까지 파급되지 못했습니다. 그는 1844~1900년 사람이니 당시 유럽은 경건주의가 힘을 얻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다릅니다. 지금의 무신론자들은 대중을 업고 있습니다. 지금은 세속화된 시대이고 일원론이 아니라 다원주의요 절대적진리를 인정하지 없습니다. 그래서 종교는 인기가 없습니다.

 

그럼 종교는 정말 없어질까요? 돈이 있고 오래 살 수만 있다면 종교는 애물단지가 될까요?

 

삼성그룹 창업자 이병철 회장이 타계하기 직전(1987) 정의채 신부에게 네 쪽짜리 질문지를 보냈습니다. 24가지 종교적인 질문을 직접 손으로 쓴 단아한 필체의 질문지입니다.

 

신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

 

신은 왜 자신의 존재를 똑똑히 드러내 보이지 않는가?”

 

신이 인간을 사랑했다면, 왜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주었는가?”

 

죽은 후에 영혼은 죽지 않고, 천국이나 지옥으로 간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나?”

 

지구의 종말은 오는가?”

 

이병철 회장이 죽음 앞에서 알고 싶었던 24개의 질문은 누구나 갖는 질문이며 죽음 앞에서 풀고 싶은 내용입니다. 그러기에 인간과 신, 인간과 종교는 떠날 수 없는 쌍둥이 운명입니다.

왜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종교, 신앙이라는 DNA를 넣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3:11)

 

영원을 사모함, 누구나 어머니와 고향을 그리워하고 소중한 사람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있듯이 하나님을 사모하는 심정이 인간에게 있기에 인류는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습니다.

 

뛰어난 학자 스탠리 피쉬에게 어느 기자가 물었습니다. 고등이론, 학문의 세계에서 지성적인 에너지의 중심을 이루던 인종과 성(), 계급이란 삼두체제가 물러나면 무엇이 그 뒤를 이을 것 같은가? 스탠리는 간단히 대답했습니다. 종교다!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사라져도 종교는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말이 종교인구의 성장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과학이 발달할수록, 먹고 살만한 풍요로 채워질수록 종교는 인기를 잃고 종교인들 사이에도 두 부류가 생겨납니다. 더 신앙적인 사람과 덜 신앙적인 사람들!

 

이런 시대에 우리는 과연 우리 집안에서 종교가 계속 계승될 것이냐, 종교대물림이 내 대에서 단절될 것인가, 혼자 믿다 꺼져버리는 종교 취미생활이 될 것이냐, 라는 기로에 있습니다.

 

종교, 혹은 신앙은 무엇인가? 우리는 왜 종교를 갖는가? 종교를 갖는 목적은 무엇인가?

 

<두산백과-동아대백과사전> 종교 무한(無限절대(絶對)의 초인간적인 신을 숭배하고 신성하게 여겨 선악을 권계하고 행복을 얻고자 하는 일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러니까 종교란 초인간적인 신을 숭배해서 내 힘으로 이루지 못한 일들을 이루고 선과 악을 가려내어 품위 있는 삶을 살고 마음에 행복을 얻으려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이런 해석은, 종교의 기본목적은 복을 받기 위해 종교를 믿는다는 기복(祈福)신앙입니다. 복이라면 어떤 대상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산신령, 용왕님, 하늘님, 옥황상제, 바윗돌조차 복의 대상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모든 자연물에 신이 깃들어 있다는 범신론 사상입니다.

기복신앙은 이기적 인간을 만들어 냅니다. 남은 어떻든지 나만 잘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기복신앙에는 윤리성, 공익성이 희박합니다. 정직과 진실과 용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어떤 이들의 종교관은 도덕과 윤리입니다. 유교가 이런 경우에 해당됩니다. 사람이 사는 도리를 말합니다. 그러기에 죽은 이후에는 관심도 없고 답도 없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신앙이 왜 필요한가? 우리에게도 기복과 윤리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신의 초월적 힘으로 복을 받자고 종교를 갖고 신의 도움으로 바르게 살려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만한 기능만으로도 종교의 효능성은 어떤 학문, 사상, 예술보다 나은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신앙은 그런 효과를 얻으려고 종교생활 하기에는 희생이 너무 큽니다. 기독교신앙은 기복이나 윤리라는 하수(下手)가 아니라 훨씬 상수(上手)입니다. 그것은 영혼구원입니다.

 

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영혼 구원! 이 말에는 몇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인간은 육체만 아니라 영혼을 지닌 존재다, 육체는 눈에 보이는 것이요 영혼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육체는 한시적이요 영혼은 영원하다~

 

-육체의 건강과 쾌락과 성공은 안개와 같은 것에 불과하고 영적인 삶만이 영원하다!

 

-그러기에 종교를 가지려면 기복주의도 좋고 윤리와 마음에 평안, 가정의 행복도 좋지만 진정한 신앙의 목적은 영혼 구원에 두어야 한다!

 

이런 취지로 베드로 사도는, 믿음의 결과는 영혼 구원이라 말합니다. 만약 영혼 구원을 보장해 주지 못한 종교라면 그건 종교취미생활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제대로 된 종교의 목적으로 신앙생활하려면 최우선의 과제를 영혼구원에 두고 어떻게 내 영혼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진지하게 구도자적 자세로 출발해야 합니다. 복이나 받고 윤리적인 도움을 받는 종교라면 대충 믿어도 되지만 생명과 관계되는 암() 치료를 대충해서 되겠습니까? 영혼문제, 내세에서의 영생의 삶은 대충으로 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영혼구원이라는 기독교신앙의 목적을 이루려면 바른 믿음의 동기가 있어야 합니다. 믿는 동기가 기복주의나 윤리주의나 박애주의 정신으로 시작해서는 안 됩니다. 기복의 동기는 기복으로 끝나고 윤리적인 동기는 점잖은 사람으로 끝납니다. 구원을 받는 믿음이 되기 위해서는 그만한 믿음의 동기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믿음을 기복으로만 이해하지 말고 하나님의 존재와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에, 내 생애를 의존하고 맡기는 진정한 신앙이 나오려면 신앙적인 동기가 필요합니다. 참 믿음을 위해서는 세 가지 한계를 인정해야 합니다.

 

-인간 능력의 한계. 돈이 전부일까요? 이병철씨의 소원은, 불고기를 실컷 먹어보는 것입니다. 돈 가지고도 가정을 살 수 없고 자식들을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대통령 권력도 불가능한 일이 있고 최고의 의학박사도 내 자식을 살려낼 수 없습니다서울대학교병원장이 암 환자들을 위한 의료기구를 설치하고 본인이 시운전 촬영했는데 암으로 판명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자만할 때 믿음은 없습니다. 종교가 있다 해도 진짜 믿음이 아니라 액세서리에 불과합니다. 인간능력의 한계를 알게 될 때 진짜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인간 생명의 한계. 종교의 1차적 목표는 죽음 너머이고 영생에 관한 것입니다. 건강했던 사람들도 죽음 앞에 이르러서는 영생을 생각하게 되고 하나님께 귀의합니다복제를 통해 계속 살 수 있다면 믿음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창세기 4: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했습니다. 창세 이후 인간이 자발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찾은 일이 없습니다. 셋에게서 비로소 하나님의 이름을 자발적으로 부르게 된 것입니다.

 

에노스’. 그 의미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 셋은 처음으로 죽음을 알고 아들을 낳으면서 죽음의 존재라고 선언합니다. 죽음 앞에서 영생하시는 하나님을 부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죽음은 인간의 운명입니다. 죽는다! 영원히 사는 길이 없을까? 진정한 구도자들은 여기에서부터 출발합니다. 그래서 영생을 기원하는 피라미드를 만들고 종교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인간 의()의 한계. 사회학자이자 신학자 토니 캄폴로는 인간은 죽을 때 못다 이룬 업적을 후회하면서 죽지 않는다, 바르게 살지 못한 것을 후회하면서 죽는다고 했습니다. 그래요! 그 누구도 죽음 앞에서는 업적이 아니라 자기의 의를 생각하고 의의 한계성을 인정하게 됩니다.

 

바울, 루터, 칼빈 등은 자기의()의 한계를 발견한 사람들입니다. 내 의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었기에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게 된 동기였습니다.

 

믿음의 동기 세 가지를 어떤 말로 요약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자신이 완전히 파산했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비로소 참된 믿음이 출발된다는 것입니다. 제한적인 내 능력을 인정하고 인간 생명의 한계를 인정하고 자기 의로움을 의지하던 상태에서 자신에게 완전히 절망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겨야 함을 인정합니다. 이런 동기가 배제된 채 단순히 복을 기원하는 종교는 참된 구원이 될 수 없습니다.

 

결국 믿음의 동기는 믿음의 주체와 이어집니다. 믿음의 주체가 누구인가? 여기에서부터 일반 종교와 기독교와의 차이가 나타납니다. 일반종교에는 믿음의 대상은 신()이고 믿는 주체는 나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믿는 것이고 내가 안 믿는 것이다! 믿음의 선택권이 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믿음은 영혼을 구원하기에는 역부족입니다. 내가 그만한 존재인가요?

 

성경은,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2:8).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믿음의 선물을 주셔야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은 내가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믿음을 주셔야만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 모든 삶에는 하나님의 주도권이 있다! 이것이 기독교의 믿음이요 영혼이 구원되는 믿음입니다.

 

세계의 걸작품 <모나리자> <최후의 만찬> 등을 그린 레오나르도 다 빈치. 르네상스시대 이탈리아가 낳은 천재 다 빈치는 만능 예술가의 전형입니다. 그림, 건축, 과학, 의학 등 다방면에 걸쳐 인류사에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어떤 사람은 다 빈치에 대해 이렇게 극찬합니다,

 

이따금씩 자연이 하늘의 기운을 퍼붓듯, 한 사람에게 엄청난 재능이 내리는 것을 본다. 그의 작품은 신이 손을 내밀어 지은 것과 같아서 도저히 인간의 손으로 만들었다고 보기 어렵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다 빈치는 그냥 미술가, 조각가가 아닙니다. 사람과 동물시체를 해부하고 그걸 예술로 형상화합니다. 스케치북에 남긴 인체해부도는 의학발전에도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그가 말합니다. “인간의 몸은 진정 경이롭다. 하지만 육체는 그 안에 거하는 (하나님의 작품) 영혼과 비교할 때 아무 것도 아니다

 

육체 속에 들어있는 영혼! 지금은 육체 속에 가려 보이지 않기에 무시당합니다. 얼굴은 꾸며도 영혼을 꾸미는 이들이 드물고 육체건강은 염려해도 영혼의 건강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아예 영혼이 없다고 합니다. 육체가 죽으면 그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육체와 사는 삶은 길어야 100년입니다. 생물학적으로 더 오래 살아봐야 의미가 있을까요? 진짜 우리의 생애는 죽음 이후에 세계에서 영생하는 삶입니다. 영생의 삶은 영혼이 구원 받을 때 가능합니다. 그 내세의 영혼의 삶을 위해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감사하게도 우리는 하나님에게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건 믿음이라는 선물입니다. 그 믿음을 주시면서 믿으면 영혼을 구원해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믿음의 1차적 목적은 영혼구원이고 종교의 동기도 영혼구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8:36)

 

자기목숨이 영혼입니다. 세상을 얻고도 자지영혼이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어찌 그런 성공을 성공이라 할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니체는 철학적으로는 명예를 얻었지만 하나님을 거부한 그의 영혼은 파리해져서 10년동안 정신병 환자로 살다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한 자의 비극적인 말로(末路)입니다.

 

결론

 

프랑스의 사상가 파스칼이 대충 이런 내용의 말을 합니다.

 

종교는 어차피 도박이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기쁨도 얻고 희망도 얻으면서 살면 얼마나 좋은가? 그럴리는 없지만 만약, 만약에 천국과 지옥이 없어도 세상에서 그만큼 종교가 주는 축복을 누렸으면 그래도 믿지는 종교생활은 아니다. 그런데 정작 천국과 지옥이 있다면 그때 당신은 어찌될 것인가? 그러기에 나는 이왕 도박이라면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쪽에 걸겠다!”

 

<어린이대백과사전>은 종교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신이나 절대적인 힘을 통하여 인간의 고민을 해결하고 삶의 근본 목적을 찾는 문화 체계

 

종교가 문화체계? 기독교신앙은 문화체계가 아닙니다. 그건 우리 영혼을 구원해 주는 최고의 학문이며 사상이며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내려주신 최고의 은총이자 축복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바른 동기와 바른 목적을 세우고 바른 기독교신앙 가운데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