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수단
사도행전 16장 11-15절
서론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입니다. 은혜라는 단어가 291번이나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해 주신 것도 은혜요, 믿음 가운데서 살게 하시는 것도 은혜요, 한 교회에 모여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음도 은혜입니다. 가정적으로도 여러 모양의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이 모든 것을 인정하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여호와의 은혜는 너무도 크고 놀랍습니다.”라는 고백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서 은혜 받은 생활을 계속해 나가기를 원합니다.
은혜(恩惠)는 ‘나에게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이요, ‘영적인 행복’입니다. 은혜를 많이 받고 많이 누리는 신자들이 더 기쁘고, 교회생활에 활기가 넘치게 됩니다. 아무리 좋은 승용차도 기름을 주유 받지 않으면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한두 번 받는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움직이는 활동만큼 기름을 받아야 합니다. 기름을 공급 받지 않고 달리기만 한다면 자동차는 망가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올해 9월까지의 출생아는 17만 7천명입니다. 10년 전에 비해 반토막이 났습니다. 그래서 뉴욕 타임즈는 2075년 대한민국은 최고령국가가 될 것이라며 보도했으며 미래학자들은 미래에 지구상에서 사라져버릴 국가 중에 우리나라를 선두에 두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이 소한민국으로 전락한다는 것입니다. 출산률 저하로 인구가 수급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구원 얻을 수 없고, 한 시간도 살 수가 없습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공급받아야 합니다. 이런 은혜를 어디에서 받아야 합니까?
정부는 우리를 위해 의료보험의 혜택을 줍니다. 고령연금을 줍니다. 먹을 것도 주고 입을 것도 주며 주택을 지어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은혜를 우리에게 줄 수는 없습니다. 우리에게 은혜를 주는 것은 교회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교회에 저장시켜놓으셨고 은혜의 공급까지 맡기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피로 세우신 교회에 잘 참예하면서 그 지체가 되어 있어야 은혜를 정상적으로 공급받을 있지 기성교회를 비판하며 교회를 부인하거나 출입을 하지 않으면 그만큼 교회를 통하여 공급되는 은혜들을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주유소에 가면 기름 주유기(호스)를 승용차에 집어넣고 기름을 공급해줍니다. 교회(유형교회, 조직교회)도 하나님의 은혜를 신자들에게 공급하는 세 가지 주유기(호스)가 있습니다.
말씀으로 오는 은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은혜를 받고 그 은혜를 오래도록 간직하고, 은혜가 점점 번져가며 성품의 변화까지 이루어 내는 최고의 수준입니다. 성경 자체에서 그 실례를 찾아볼까요?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던 날 아침, 글로바와 또 한 제자가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내려진 검색을 피하기 위해 엠마오로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처형 사건에 당혹과 좌절감을 감추지 못하여 슬픈 빛(눅 24:17)을 띠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께서 성경을 풀어주실 때(27절) 마음이 뜨거워지는 역사(32절)를 체험합니다. 마음이 뜨거워졌을 때, 슬픈 기색은 사라졌고, 기쁨이 그들을 사로잡았으며, 다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는 용기 있는 행동까지 나타나게 됩니다. 예루살렘, 그곳은 죽음과 공포와 체포와 두려움이 있는 곳이었지만, 기뻐하며 되돌아갑니다. 은혜를 크게 받은 모습입니다.
무엇이 슬픈 빛의 얼굴을 가슴이 뜨거워지는 얼굴로 변하게 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 들을 때에 뜨거워지는 은혜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참된 은혜는 얼굴빛이 환하여지고, 가슴만이 뜨거워지는 것으로는 안 됩니다. 인간의 가슴은 변덕이 심합니다. 쉽게 뜨거워졌다 차가워질 수도 있습니다. 환경의 변화에 예민한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그만큼 변덕이 심합니다. 손바닥 몇 번 두들겨 놓고서도 금방 달아오를 수 있는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군중집회에 참여하여 구호를 외치다가도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이런 마음의 상태가 교회 안에서 이루어졌다고 은혜라 할 수는 없습니다. 은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오며 그 말씀이 우리의 가슴을 찌르고, 뜨겁게 하고, 감동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로 인해 새로운 삶으로의 결단이 일어날 때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약한 곳이 바로 말씀으로 오는 은혜가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성이 쉽게 감동하고 정이 많기에 약간만 분위기가 쓸쓸해도 울음이 나옵니다. 교회 안에도 이런 분위기가 많습니다. 그러나 말씀으로 오는 은혜가 아니면 거짓 은혜이요, 일시적인 자기의 감정에 불과합니다. 부흥집회에 참석하여 부흥강사의 원맨쇼를 방불케 하는 이야기에 은혜를 받았더라도, 넘어지기도 하고, 자빠져도 그것이 말씀 중심의 은혜가 아닐 때에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생활의 변화로까지 이끌어 주지 못합니다. 일시적인 흥분만 주며, 며칠 지나면 다시 갑갑해집니다. 이 갑갑함과 허전함을 채우기 위해 이곳저곳 부흥집회, 간증집회, 은사집회만 찾아다니게 됩니다. 옛날이야기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런 은혜도 그리워집니다.
칼빈은 말씀의 능력에 대해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도를 희생 제물로 드리는 데 쓰이는 ‘칼(gladius)’이요, 성도의 부정함을 씻어내는 ‘물(aqua)’이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게 자라도록 하는 ‘밥(cibus)’이며, 죄로 인한 질병을 치유하는 ‘약(medicina)’이고, 거기서 하나님이 자신의 약속을 가지고 우리를 만나시는 ‘방(locus)’이자, 그리스도와 성령이 오시는 ‘길(via)’이며, 신앙이 자라게 하는 ‘씨(semen)’이고, 그리스도를 비추이는 ‘거울(specula)’이며,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는 ‘재갈(frenus)’이다.”
우리가 진정한 신자로서 풍성한 삶을 살기 원한다면 성경을 펼쳐들고 말씀에서 오는 은혜를 체험하세요. 주일마다 강단에서 나오는 성경말씀에 은혜를 받으세요! 그런 은혜야말로 구원의 능력이 될 것이며, 예수님으로부터 오는 많은 특권(영생, 양자, 하늘 기업)들을 누리게 할 것이며, 힘을 줄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성령 하나님께서 하시는 바, 성령은 언제나 말씀을 통하여 역사 하는 것을 즐기시기 때문입니다.
세례로 오는 은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 성찬예식을 제정해 주셨습니다. 성찬예식은 예수님의 희생의 살과 피를 생각(기념)하며 떡과 포도주를 나누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예식을 제정해 주시면서 다시 올 때까지 이 예식을 간수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2천년의 교회는 주님의 당부를 좇아 지금까지 시행해 오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성찬예식, 성례식이라 할 때는 세례도 염두에 둡니다. 세례식을 하고 난 다음에 성찬식도 함께 나누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세례(물세례)가 나타난 것은 세례 요한부터입니다. 지금까지 할례가 있었지만 요한은 요단강에서 물로 세례를 주었습니다. 물 세례식에 예수님도 참여하셨습니다. 요한이 세례 베푸는 것을 황송스럽게 생각하고 머뭇거리자 예수님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마 3:15), 하시면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일이며, 앞으로 교회가 그 예식을 계속 시행해 나가야 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주신 일은 성경에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세례를 등한시했거나, 세례를 주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세례는 구약에서 이스라엘 총회(백성들)가 행하던 일종의 할례의식과 같은 것입니다. 할례(割禮)는 언약의 백성들 속에 참예하게 되었다는 외적인 구별의 표식입니다. 세례 역시 하나님의 백성으로 새 생명을 얻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물세례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공회(교회 회중) 앞에 공표하는 예식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세례가 전제되지 않은 물세례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로마 가톨릭은 세례를 구원의 절대적인 것으로 보며, 무조건 물세례를 받기만 하면 구원이 보장된다는 값싼 복음을 남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신약의 성례이다. 그것은 유형적 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무리들이 그 교회에 참가하는 엄숙한 입회(入會)를 의미하는 것뿐만 아니라, 본인이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고, 중생과 사죄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 생명으로 살겠다고 하나님께 자신을 봉헌하는 은혜계약의 표와 인침을 의미한다.…. 그러나 세례를 안 받았다고 하여 그 사람이 중생할 수 없다든가 또 세례를 받은 사람은 모두 분명히 중생했다고 할 만큼 세례가 은혜와 구원받음을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서 제 28장 1절, 5절)
어떤 이들은 물세례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합니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 굳이 세례 받을 까닭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했던 사람이 어거스틴입니다. 그는 믿음이 독실한 모친에게서 일찍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오랫동안 방탕을 거듭하다가 돌아왔습니다. 그의 후회 중의 하나가, “내가 세례를 받으라 했을 그때 세례를 받았으면 이렇게 방탕하며 세월을 낭비하지 않았을 것이다.” 라고 아쉬움을 표했습니다.
물세례는 공중들 앞에서의 자기 신앙고백의 표현이기에 참 신자라면 세례는 필수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럴 때 세례의식을 통하여 죄 사함과 옛 생활의 죽음, 새 생명의 태동… 등을 느끼며 은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친히 세례의 본을 보였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찬을 통한 은혜
성찬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제정해 주신 예식입니다. 성도님들 중에는 성찬을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정도로 이해하고 넘어가지만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성찬은 은혜의 수단, 다시 말하면 성화의 수단입니다. 주님께서는 성찬예식의 제정을 통해 십자가에서 죽으심-대속적 죽음, 희생적 죽음의 의미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떡을 나눠주시며 “이것은 내 살이라”하셨고, 포도주를 나눠주시면서 자신의 피라 하셨습니다. 계속해서 예식을 시행하며 십자가의 의미를 깨달으라고 하셨습니다.
성찬은 주님의 죽으심을 보여주는 상징적 표시이면서, 아울러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와 효과가 영적으로 임재하는 실재적 표시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성찬을 통하여 나를 위해 대속의 죽음을 당하신 예수님을 생각하고, 그분의 죽음에 동참합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과 연합된 자로서 우리의 영혼에 그분의 생명, 능력, 기쁨이 강하게 역사 하시고, 임재하시고, 공급되는 영적 은혜들을 체험합니다. 그리스도와의 신비로운 연합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성화의 자리로 점점 나아가는 것입니다.
성찬에 관하여서는 교파마다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개혁주의 교회에서는 기념설 내지 영적임재설을 받아들입니다. 성찬예식에 참여할 때마다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을 생각하고 기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로마 가톨릭은 화체설을 주장합니다. 떡과 포도주가 신부의 축사를 거치는 순간 예수님의 진짜 살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억지주장에 불과합니다. 떡과 포도주가 어찌 예수의 육체의 일부가 될 수 있을 것인가요? 예식을 하다 남긴 것을 잘못 보관할 경우, 고양이나 쥐가 그것을 핥아먹을 경우, 고양이도 예수님의 피와 살을 먹은 것인가요?
교회 안에 있는 거듭나지 못한 신자들도 세례 받을 수 있고, 성찬예식에 참여합니다. 떡과 포도주를 받습니다. 그렇다면 거룩한 예수님의 (진짜)몸이 구원받지 못할 거짓 신자들 속에도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인가요? 구원받지 못할 거짓 신자들 속에 들어간다면 그것은 무가치한 일입니다. 예수님의 피와 살이 무가치하게 나눠진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주님이 흘리신 피 한 방울은 모두 가치가 있고, 생명을 구원하는 일에 사용됩니다. 무가치한 것에는 단 한 방울의 피도, 한 점의 육체도 나눠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화체설은 비성경적이며, 로마교회 사제들의 권위를 높여주기 위해서 나온 바티칸의 교리일 뿐입니다.
<신부가 축사하거나 다른 방법을 통해서 떡과 포도주의 실체가 그리스도의 참 살과 참 피로 변한다고 주장하는 소위 화체설은 성경에 모순될 뿐 아니라, 상식과 이성에도 모순된다. 또한 그것은 성례의 본질을 무너뜨리는 생각이며, 과거나 현재에 있어서도 여러 가지 미신의 원인이 되어 왔으며, 실로 큰 우상숭배의 원인이 되어있다.>(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서 제29장 6절)
성찬예식은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백성들에게 허락하신 큰 선물이며, 은혜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운반하는 큰 파이프입니다. 진실한 기독교인이라면, 세례를 받으면서, 떡과 포도주를 나누면서 “웬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하는 찬송을 부르면서 눈물 흘려본 경험들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이사야 53장의 성경 구절을 읽으면서 치밀어 오르는 감동을 억제하지 못했던 체험도 있을 것입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 죽어주셨으니. 그분의 희생으로 내가 죄 사함을 얻고 구원받았다니. 나 같이 천한 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니, 이제 나도 새 생명을 얻었구나, 이런 사실을 생각하면서 눈물 흘리고, 흐느끼고, 감격하고…. 이것이 참 은혜요, 성경적 은혜입니다. 이런 은혜를 체험해 보아야 은혜의 맛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은혜 없이 가슴이 뜨겁다 하여 모두 은혜로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참은혜와 거짓은혜를 분별할 수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결론
지난 주일에 무교회주의, 가나안교회, 영상예배교인…에 대해 말씀을 전했습니다. 개인적인 견해로, 무교회주의는 말씀을 열심히 공부하고 예수의 정신으로 살아가려는 장점이 있습니다. 가나안교회는 예수님을 싫어하거나 교회를 싫어하지 않습니다. 교인들이 싫은 것입니다. 영상예배신자는 교회도 좋아하고 신자들도 좋아합니다. 단, 형식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름 장점들이 있지만, 이 분들에게 결정적인 한 방이 있습니다. 은혜의 수단에 제대로 참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실제적으로 강단 앞에서 말씀을 받는 것이 은혜이겠습니까, 편안한 자세로 텔레비전을 시청할 때 은혜가 되겠습니까. 이들에게는 자녀들을 위한 세례도, 공동체의 성찬도 없습니다. 은혜의 수단 세 파이프가 모두 막힌 것입니다. 그러니 은혜를 공급하는 양이 매우 적습니다. 그러다보면 은혜의 생활이 비판적이고, ‘자기의’에 빠지게 되고 옆에서 지도해 주는 지도자가 없기에 푸성귀처럼 멋대로 자라기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정한 신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 가지 모두 은혜의 수단 안에 있으니 더욱 은혜 안에서 자라나야 합니다.
소양강댐을 물로 채우는 데는 7년! 안동댐을 채우는 데는 3년이 걸렸습니다. 가득 채워진 댐의 물로 논과 밭에 물을 대고 나무와 풀들이 자라납니다. 그러나 댐에서 수문을 열고 물을 빼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를 채워가는 일은 오래 걸리지만 쏟아져 버리는 데에는 순간입니다. 은혜가 새지 않도록, 은혜가 쏟아지지 않도록 교회에서 서로 조심해야 합니다. 자신의 영적관리를 잘 해야 은혜가 쌓여지고 은혜의 사람들이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서 더욱 자라나시기를 기원합니다!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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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교회(敎會)에서 요즘 많이 사용되고 있는 용어가 무엇인지 눈치 채고 있습니까? ‘은혜’입니다. 일반 사회에서는 어버이날이 가까워야 ‘은혜’라는 말을 쓰고, 하고, 들을 수 있는데, 교회에서는 흔한 용어가 ‘은혜’입니다. 예배 참석하고 예배당을 나서면서 이런 말을 많이 해보셨습니까?
“오늘 예배는 참 은혜로웠다”,
“설교에 은혜 많이 받았다”,
“찬양대의 찬양이 은혜롭다”
이런 말들이 입술에 많이 있으면 은혜로운 성도님들입니다. 은헤로운 장로님, 권사님들, 제직들입니다. 이런 말을 해 본적이 거의 없다면 여러분은 은혜없는, 비은혜의 장로님, 권사님들, 제직들입니다.
교회다움은 은혜에 있습니다. 은혜를 많이 말하는 사람이 좋은 교인이요 은혜로운 교회입니다. 은혜의 입술이 아니라면 여러분은 비은혜의 성도입니다.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교는 은혜의 종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도 큰 은혜요, 믿음 가운데서 살게 하시는 것도 은혜요, 한 교회에 모여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음도 은혜입니다. 가정적으로도 여러 모양의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이 모든 것을 인정하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여호와의 은혜는 너무도 크고 놀랍습니다.”라는 고백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서 은혜 받은 생활을 계속해 나가기를 원합니다.
은혜(恩惠)는 다른 말로 ‘나에게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이요, ‘영적인 행복’입니다. 이것을 많이 받고 많이 누리는 사람들은 신앙생활이 더 기쁘고, 교회 생활에 활기가 넘치게 됩니다.
이런 은혜를 꼭 받아야 하고, 계속 누려야 할 터인데, 어떤 수단을 통하여 이 은혜를 공급받을 수 있을 것인가요? 부흥회에 참석하여 눈물 콧물을 다 짜내면서 실컷 울고 나면 은혜를 받는 것일까요?
그런 영적 애씀도 은혜생활을 하는데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경험들이 체험적인 믿음으로 나가게 합니다. 그러나 그런 은혜는 자칫 감정적일 수 있습니다. 마음이 허전하고 답답하니까 비슷한 사람들끼리 어울리게 되면 설움이 복받쳐 오르고, 그래서 눈물을 펑펑 쏟으면 목에 걸렸던 것이 없어지는 것처럼 후련함도 하지만, 이런 감정은 꼭 교회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은혜가 아닙니다. 답답한 일이 있을 때 친정어머니를 찾아가 하소연을 늘어놓으며 실컷 울고 나면 역시 가슴이 후련한 경우도 있지 않은가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구원 얻을 수 없고, 단 한 시간도 살아갈 수 없습니다. 계속해서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은혜를 공급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은혜를 교회에 저장시켜놓으셨고 은혜의 공급까지 맡기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피로 세우신 교회에 잘 참예하면서 그 지체가 되어 있는 교인들이 은혜를 정상적으로 공급받을 있는 것이지 기성교회를 비판하며 교회를 부인하거나 출입을 하지 않으면 그만큼 교회를 통하여 공급되는 은혜들을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교회(유형교회, 조직교회)는 어떤 수단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신자들에게 공급하게 되는가요? 말씀과 성례(세례와 성찬)입니다. 이런 방편을 통해서 얻어지는 은혜가 진정한 하나님의 은혜이지, 말씀도 없고, 성례도 없이 어느 집회에 참석하여 간증을 듣다, 기독교영화를 보다 감동을 받고 소위 은혜를 받았다는 것은 일시적인 흥분에 불과합니다.
진짜 은혜는 무엇인가요? 내가 받은 은혜가 참 은혜임을 알려면 그 기준은 무엇인가요?
말씀으로 오는 은혜
첫째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은혜를 받고 그 은혜를 오래도록 간직하고, 은혜가 점점 번져가며 성품의 변화까지 이루어 내는 최고의 수준입니다. 성경 자체에서 그 실례를 찾아볼까요?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던 날 아침, 글로바와 또 한 제자가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내려진 검색을 피하기 위해 엠마오로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처형 사건에 당혹과 좌절감을 감추지 못하여 슬픈 빛(눅 24:17)을 띠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께서 성경을 풀어주실 때(27절) 마음이 뜨거워지는 역사(32절)를 체험합니다. 마음이 뜨거워 졌을 때, 슬픈 기색은 사라졌고, 기쁨이 그들을 사로잡았으며, 다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는 용기 있는 행동까지 나타나게 됩니다. 예루살렘, 그곳은 죽음과 공포와 체포와 두려움이 있는 곳이었지만, 기뻐하며 되돌아갑니다. 은혜를 크게 받은 모습입니다.
무엇이 슬픈 빛의 얼굴을 가슴이 뜨거워지는 얼굴로 변하게 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 들을 때에 뜨거워지는 은혜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참된 은혜는 얼굴빛이 환하여지고, 가슴만이 뜨거워지는 것으로는 안 됩니다. 인간의 가슴은 변덕이 심합니다. 쉽게 뜨거워졌다 차가워질 수도 있습니다. 환경의 변화에 예민한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그만큼 변덕이 심합니다. 손바닥 몇 번 두들겨 놓고서도 금방 달아오를 수 있는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군중집회에 참여하여 구호를 외치다가도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이런 마음의 상태가 교회 안에서 이루어졌다고 은혜라 할 수는 없습니다. 은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오며 그 말씀이 우리의 가슴을 찌르고, 뜨겁게 하고, 감동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로 인해 새로운 삶으로의 결단이 일어날 때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약한 곳이 바로 말씀으로 오는 은혜가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성이 쉽게 감동하고 정이 많기에 약간만 분위기가 쓸쓸해도 울음이 나옵니다. 교회 안에도 이런 분위기가 많습니다. 그러나 말씀으로 오는 은혜가 아니면 거짓 은혜이요, 일시적인 자기의 감정에 불과합니다. 부흥집회에 참석하여 부흥강사의 원맨쇼를 방불케 하는 이야기에 은혜를 받았더라도, 넘어지기도 하고, 자빠져도 그것이 말씀 중심의 은혜가 아닐 때에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생활의 변화로까지 이끌어 주지 못합니다. 일시적인 흥분만 주며, 며칠이 지나면 다시 갑갑해집니다. 이 갑갑함과 허전함을 채우기 위해 이곳저곳 부흥집회, 간증집회, 은사집회만 찾아다니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풍성한 삶을 살기 원한다면 성경을 펼쳐들고 말씀에서 오는 은혜를 체험하세요. 주일마다 강단에서 나오는 성경말씀에 은혜를 받으세요!
그런 은혜야말로 구원의 능력이 될 것이며, 예수님으로부터 오는 많은 특권(영생, 양자, 하늘 기업)들을 누리게 할 것이며, 힘을 줄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성령 하나님께서 하시는 바, 성령은 언제나 말씀을 통하여 역사 하는 것을 즐기시기 때문입니다.
세례로 오는 은혜
진짜 은혜(진짜 은혜라는 말 제체가 우습지만 하도 가짜가 많다보니까 이런 용어를 쓸 수밖에 없다)의 두 번째 기준은 세례식을 통해서 오는 은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 성찬예식을 제정해 주셨습니다. 성찬예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살과 피를 생각(기념)하며 떡과 포도주를 나누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예식을 제정해 주시면서 다시 올 때까지 이 예식을 간수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2천년의 교회는 주님의 당부를 좇아 지금까지 시행해 오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성찬예식, 성례식이라 할 때는 세례도 염두에 둡니다. 세례식을 하고 난 다음에 성찬식도 함께 나누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세례(물세례)가 나타난 것은 요한부터입니다. 지금까지 할례가 있었지만 요한은 요단강에서 물로 세례를 주었습니다. 물 세례식에 예수님도 참여하셨습니다. 요한이 세례 베푸는 것을 황송스럽게 생각하고 머뭇거리자 예수님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마 3:15)고 하시면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일이며, 앞으로 교회가 그 예식을 계속 시행해 나가야 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주신 일은 성경에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그분이 세례를 등한시했거나, 세례를 주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분은 세례를 인정하셨고, 세례를 주시기도 했을 것입니다. 세례 속에 포함되어 있는 의미가 그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세례는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하던 일종의 할례의식과 같은 것입니다. “할례”(割禮)는 언약의 백성들 속에 참예하게 되었다는 외적인 구별의 표식입니다. 세례 역시 하나님의 백성으로 새 생명을 얻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물세례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공회(교회 회중) 앞에 공표하는 예식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세례가 전제되지 않은 물세례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로마 가톨릭은 세례를 구원의 절대적인 것으로 보며, 무조건 물세례를 받기만 하면 구원이 보장된다는 값싼 복음을 남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신약의 성례이다. 그것은 유형적 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무리들이 그 교회에 참가하는 엄숙한 입회(入會)를 의미하는 것뿐만 아니라, 본인이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고, 중생과 사죄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 생명으로 살겠다고 하나님께 자신을 봉헌하는 은혜계약의 표와 인침을 의미한다.…. 그러나 세례를 안 받았다고 하여 그 사람이 중생할 수 없다든가 또 세례를 받은 사람은 모두 분명히 중생했다고 할 만큼 세례가 은혜와 구원받음을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서 제 28장 1절, 5절)
어떤 이들은 물세례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합니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 굳이 세례 받을 까닭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물세례는 공중들 앞에서의 자기 신앙고백의 표현이기에 참 신자라면 세례는 필수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럴 때 세례의식을 통하여 죄 사함과 옛 생활의 죽음, 새 생명의 태동… 등을 느끼며 은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친히 세례의 본을 보였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찬을 통한 은혜
참 은혜를 받는 세 번째 수단은 성찬입니다. 성찬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제정해 주신 예식입니다. 주님은 이런 예식의 제정을 통해 십자가에서 죽으심-대속적 죽음, 희생적 죽음의 의미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떡을 나눠주시며 “이것은 내 살이라”하셨고, 포도주를 나눠주시면서 자신의 피라 하셨습니다. 계속해서 예식을 시행하며 십자가의 의미를 깨달으라고 하셨습니다.
성찬은 주님의 죽으심을 보여주는 상징적 표시이면서, 아울러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와 효과가 영적으로 임재하는 실재적 표시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성찬을 통하여 나를 위해 대속의 죽음을 당하신 예수님을 생각하고, 그분의 죽음에 동참합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과 연합된 자로서 우리의 영혼에 그분의 생명, 능력, 기쁨이 강하게 역사 하시고, 임재하시고, 공급되는 영적 은혜들을 체험합니다.
성찬에 관하여서는 교파마다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개혁주의 교회에서는 기념설을 받아들입니다. 성찬예식에 참여할 때마다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을 생각하고 기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로마 가톨릭은 화체설을 주장합니다. 떡과 포도주가 신부의 축사를 거치는 순간 예수님의 진짜 살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억지주장에 불과합니다. 떡과 포도주가 어찌 예수의 육체의 일부가 될 수 있을 것인가요? 예식을 하다 남긴 것을 잘못 보관할 경우, 고양이나 쥐가 그것을 핥아먹을 경우, 고양이도 예수님의 피와 살을 먹은 것인가요?
신자 중에는 참 신자가 있고, 형식적인 신자가 있습니다. 형식적인 신자들도 세례를 받을 수 있고, 성찬예식에 참여합니다. 떡과 포도주를 받습니다. 그렇다면 거룩한 예수님의 (진짜) 몸이 구원받지 못할 거짓 신자들 속에도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인가요? 구원받지 못할 거짓 신자들 속에 들어간다면 그것은 무가치한 일입니다. 예수님의 피와 살이 무가치하게 나눠진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주님이 흘리신 피 한 방울은 모두 가치가 있고, 생명을 구원하는 일에 사용됩니다. 무가치한 것에는 단 한 방울의 피도, 한 점의 육체도 나눠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화체설은 비성경적이며, 로마교회 사제들의 권위를 높여주기 위해서 나온 바티칸의 교리일 뿐입니다.
<신부가 축사하거나 또는 다른 방법을 통해서 떡과 포도주의 실체가 그리스도의 참 살과 참 피로 변한다고 주장하는 소위 화체설은 성경에 모순될 뿐 아니라, 상식과 이성에도 모순된다. 또한 그것은 성례의 본질을 무너뜨리는 생각이며, 과거나 현재에 있어서도 여러 가지 미신의 원인이 되어 왔으며, 실로 큰 우상숭배의 원인이 되어있다.>(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서 제 29장 6절)
성찬예식은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백성들에게 허락하신 큰 선물이며, 은혜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운반하는 큰 파이프입니다. 진실한 기독교인이라면, 세례를 받으면서, 떡과 포도주를 나누면서 “웬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하는 찬송을 부르면서 눈물 흘려본 경험들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이사야 53장의 성경 구절을 읽으면서 치밀어 오르는 감동을 억제하지 못했던 체험도 있을 것입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 죽어주셨으니…. 그분의 희생으로 내가 죄 사함을 얻고 구원받았다니….
나 같이 천한 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니…. 이제 나도 새 생명을 얻었구나….
이런 사실을 생각하면서 눈물 흘리고, 흐느끼고, 감격하고….
이것이 참 은혜요, 성경적인 은혜입니다. 이런 은혜를 체험해 보아야 은혜의 맛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은혜가 없이 가슴이 뜨겁다 하여 모두 은혜로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참 은혜와 거짓 은혜를 분별할 수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결론
교회론을 마무리하면서 우리 자신이 바른 교회요, 성전의 구실을 제대로 하고 있는가를 다시 한 번 곰곰이 따져보아야 합니다. ‘교회에 다닌다’-이것이 우리의 신앙 표현의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에 다니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곧 교회이다’, ‘걸어 다니는 예배당이다’, ‘내 마음속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늘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하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만약 그런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는 기독교를 종교의 하나로 신봉하고 있을 뿐이지, 진정한 그리스도교인이 아닙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내 속에 도입된 성전의 개념을 늘 명심하고, 내 속에 임재하고 계시는 주님과 매일 매일의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진리를 이 세상에 알리기 원하십니다. 이런 일을 하실 때에는 자신이 창조하신 사람을 도구와 수단으로 사용하십니다. 구약시대 때 하나님의 진리를 맡아 전파하는 수단은 이스라엘 백성이었습니다. 그들 회중은 하나님을 경배하며 말씀 전하는 일을 즐거이 감당하려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들은 혈통을 통해서 전파되고 전달되었습니다.
신약시대에 들어오면서 그리스도와 제자들은 진리를 세상에 퍼뜨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진리를 완벽하게 전하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 자신이시며, 진리 자체였기 때문입니다(요 1:1, 14:6 참조). 진리의 화신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나라로 승천하신 이후 진리를 전하는 일은 성령께 맡겨졌습니다. 성령은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오순절 날 교회를 탄생시켰습니다.
이제 진리를 전달하는 임무는 영적 존재인 교회가 맡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 어떤 일보다도 진리를 전달하는 일에 진력해야 합니다. 교회가 단지 사회사업을 하거나, 정치적인 권력수단, 압력수단으로 존재하거나, 교제의 장소로 만족해 버린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대하셨던 교회가 결코 아닙니다.
교회는 건물도, 단순한 조직체만도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 자신이 곧 교회였으며, 그들의 총회(신 23:3)가 교회였습니다. 오늘날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고백한 사람들이 바로 교회를 의미하며, 그런 사람들이 일정하게 모여 외형적 조직체를 이룬 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바른 연합을 이루고, 그의 지체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 모여 있으면 그 교회는 건강한 교회가 되나, 예수님께 속하지 않은 거짓 신자(지체)들이 득실거리는 교회는 불구가 되어버린 교회의 모습입니다.
우리 자신은 건강한 교회인가요? 늘빛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위에 세워진 교회인가요? 그리하여 복음을 설교하고 전하는 일에 주력하고 있는 교회인가요? 아니면 단순히 종교인의 하나인가? 만약 당신이 종교인 중의 하나라면 그것은 빈집에 불과합니다. 주님께서, 주님의 영이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머물지 않으신다면 큰(빈)집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요? 집은 ‘주택’보다는 ‘가정’으로서의 의미가 더 소중한 것을.
우리 교회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거룩한 성소가 되려면 우리 자신들이 하남의 영의 임재 속에 늘 갇혀 살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일 때 예배당의 모임은 세상에서 부름을 받고 나온 유형(有形) 무형(無形)의 교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좋은 교회를 만들어 가시는 성도님들로 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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